현행복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특별히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의 음악가 백결선생(百結先生)이 그렇다. 오죽 집안이 가난했으면 '일백 번이나 꿰맨[百結]' 옷을 입은 사람이란 뜻의 말이 본명처럼 그의 별명으로 따라붙게 되었던 것일까.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편에 보면 그에 대한 내용이 자못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설을 앞둔 세밑이 되자, 사방 이웃에서는 방아를 찧는 소리가 종일 들려온다. 음식 장만할 만한 여력도 없이 오직 이웃의 떡방아 소리만 들어야 하는 처지이고 보니 아내가 푸념 섞인 어투로 남편을 원망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백결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오. 그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그 가는 것을 붙좇을 수 없는 일이거늘 그대는 어찌 그리 속상해 하는 것이오. 내가 당신을 위해 방아타령이란 곡을 지어 위로해 드리리다.'

마침내 백결선생이 거문고를 뜯으며 방아타령의 곡을 연주하니, 그 소리가 정말 방아를 찧는 소리와 똑같았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방아타령'이라고 전한다." 

지금이야 세태가 바뀌어 세밑이 되어도 설 제사음식 채비로 방아를 찧을 일이 없기에 이는 아득한 옛날의 일로 돌려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난 6, 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마다 동네 어귀에는 '몰(아래아)고랑집'이라 불리던 연자방아 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5백 년 전의 제주의 실상을 담은 제주 유배인 충암 김정(金淨)이 남긴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 보면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곧 "(이 고을에) 절구는 있어도 방아는 없다"고 함이다. 여기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점은 "제주에는 본래 육지와 같이 발을 이용한 디딜방아는 없고, 다만 손을 쓰는 절구와 맷돌질만이 행해질 뿐이다"란 예상이다. 더욱이 절구 찧기를 제주에서는 '방애질'이라고 표현하면서, 절굿공이를 든 이의 수치로써 구분하기도 했는데, 세 사람일 경우 '세콜방애'라고 지칭함과 같은 양태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제주민요 가운데 있다. "가시오름 강당장(姜堂長)집에 / 세콜방애 새 글럼서라. / 전생 궂은 이내몸 가난 / 여섯콜방애 새 골람서라"고 함 따위이다. 특히 절구통은 그 재료가 돌이나 나무를 쓰는데, 통나무 속을 후벼 판 경우 특히 이를 '남방애'라고 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는 반드시 노래가 뒤따르면서 일의 동작과 함께 호흡을 맞추어나가곤 했다는 점이다. 그 곡조가 이방인의 귀에는 매우 슬픈 느낌을 선사하기도 했었던 모양이다.

예컨대 조선조 광해군 때 대정현에서 유배를 살았던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시, '마을 아낙의 방애질소리(村女杵歌)'가 그렇다.  

"토속에 디딜방아 찧는 일 없어도 / 시골 아낙네들 절굿공이 들고서 노래를 하네. / 높낮이는 마치 곡조 있어보이고 / 쉬었다가 이었다가 소리로 서로 화답하네. / 노랫말 알아채려면 누가 통역이라도 해야 할 판 / 그 소리도 자주 듣다보니 흠잡을 데 없어져. / 처량한 소리, 새벽달 비칠 때까지 들려오는데 / 나그네 귀밑머리 어느새 먼저 세어오더라"  

제주사회에서 연자방아(혹은 연자매)가 처음 등장한 것은 아마도 그때 보다 한 참 후대인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가능하게 된 일이라고 추정해본다. 

연말이 가까워올수록 송년음악회라는 이름이 여기저기서 뉴스를 타기 시작한다. 이의 레퍼토리도 주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 내재된 평화의 메시지와 감동의 선율이 일반 사람들에게 호감으로 작용했음직도 하다. 

세밑의 송년음악으로 방아타령과 같은 음악을 한번 유추해봄은 어떨까. 한 해를 돌아보며 그동안 구겨진 인간관계를 마치 다듬이질이라도 하여 펼쳐놓듯이 바르게 할 수 있게 된다면 절로 그만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백결선생의 '방아타령' 이야기야말로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는' 삶을 산 하나의 표본으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그래서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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