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사유 사물과 풍경 39. 떡갈나무 이파리를 위한 기도

떡갈나무 이파리가 뼈만 드러낸 채 말라가고 있다. 벌레 먹은 한 귀퉁이로 하늘이 내려와 앉고 바람이 길을 낸다. 새들이 빠져나갈 만큼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이다. 떡갈나무 이파리는 죽어서도 길을 내고 있다. 마치 그것이 생명의 마지막 길인 양.

2019년도 마지막 하루를 남기고 있다. 마지막이라는 낱말 앞에서는 조급함이 밀려든다. 뭔가 잊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 기분, 마지막 문을 닫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의 문장이 쏟아질 거 같아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는다. 바삐 사는 와중에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뭔가 중요한 눈빛이 있었을 것 같은 석연치 않음이 조급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머귀나무 가지에 턱 걸터앉은 벌레 먹은 떡갈나무 이파리를 보며 올 한해 내 몸과 마음을 갉아먹은 말들과 바람을 생각해본다. 보란 듯이 꼿꼿하게 살아내고 싶었으나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중심을 잡기에는 힘겨운 일들이 많았다. 내 눈과 귀를 의심하는 사건도 많았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주변의 소음을 끄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싶었으나 눈만 뜨면 쏟아지는 뉴스들은 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의 분별력을 의심케 했다. 그래서 TV를 끄고 라디오 볼륨을 소거한다. 아무리 들어도 내게는 소음이고,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할 것이라는 직감이 허공에 떠도는 파열음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자연의 소리를 듣고자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정끝별, 「속 좋은 떡갈나무」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나무 한 그루에도 이 많은 식솔들이 부둥켜 살아가고 있다. 벌레도, 이끼도, 박쥐와 오소리, 올빼미 까지도. 나무 한 그루에 이 많은 식솔들이 들어앉게 되는 건 속이 빈 나무이기 때문이다. 벌레와 이끼들이 나무의 즙을 쪽쪽 빨아먹으며 제 식구를 부양했다. 덕분에 꽃이 피고, 나무는 더욱 속이 비게 된다. 속이 비어야 더 큰 새들과 동물들이 살림을 차릴 수 있다.  

북극에 사는 가족의 일상을 담은 영화 '북극의 나누크'

떡갈나무를 생각하다 보니 바람 든 어머니의 등뼈를 떠올리게 된다. 제 몸에서 빠져나온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제 몸에 다시 구멍을 내어야만 하는 어머니의 한 생. 온 몸이 바스러져 비로소 흙이 되어야만 그 일은 끝이 날는지. 먹여 살린다는 말이 왜 이렇게 숭고하다 못해 슬프게 들리는가. 생명을 낳은 이들 혹은 생명을 가진 이들은 아무리 눈보라가 쳐도 먹여 살리고, 먹고 사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구슬프게 들린다.

'북극의 나누크'는 최초의 '상업'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상업'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걸 보니 최초의 북극 영화라는 점이 크게 호응을 얻었던 모양이다. 감독인 로버트 플래허티는 북극에 사는 나누크(Nanook, 곰이라는 뜻) 라는 사람의 가족의 일상을 담고 있다. 언뜻 보면, '북극에서 살아남기'의 혈투라 할 수 있지만 삶이 이런 것이려니 싶기도 하다. 나누크 가족은 바다표범, 물고기, 바다코끼리, 여우 등을 잡아 의식(衣食)을 해결한다. 집은 눈으로 만든 이글루이다.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들은 자연의 원리를 충분히 이용할 줄 알고 나름대로 과학적이다. 이를 테면 이글루를 지을 때는 건축의 원리를 따르고, 빛의 방향을 생각하며 창문을 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냥이 일상이지만 먹을 게 떨어질 때만 사냥을 나간다. 얼음 속에서 구멍을 찾아 해마를 잡고 얼음이 깨진 구역을 작은 배를 몰아 바다표범에 나서기도 한다. 잡은 고기를 나누어 먹고 사냥개들에게도 나누어 준다. 사람들은 이글루에서 옷을 벗고 잔다. 보는 이들이 오히려 추워 벌벌 떨 지경이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평온하다. 이글루를 빠져나오며 씨익 하고 웃음 짓는 나누크의 표정은 이보다 더 깨끗할 수 없다. 자연의 웃음 그 자체이다. 100년 전 북극에 사는 나누크의 모습은 생명본능과 함께 더불어 먹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한 그루의 '떡갈나무 시'를 생각하게 한다.  

떡갈나무 이파리가 뼈만 드러낸 채 말라가고 있다. 벌레 먹은 한 귀퉁이로 하늘이 내려와 앉고 바람이 길을 낸다. 새들이 빠져나갈 만큼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이다. 떡갈나무 이파리는 죽어서도 길을 내고 있다. 마치 그것이 생명의 마지막 길인 양. 온 몸이 부서져 흙으로 돌아가면 또 한생명의 양분이 될 것이다.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처럼 대대손손 먹여 살리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앞에서 서서 두 손 모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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