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범 행정학박사·제주공공문제연구소장·논설위원

새해 첫날 모 방송사가 9시 뉴스 시간에 보도한 '돈 빌리기 실험'을 흥미롭게 시청했다. 기자가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시민에게 다가갔다. 지갑을 놓고 왔는데 3천 원만 빌려주면 바로 갚겠다면서 도움을 요청한다. 대다수 시민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무작위로 만난 시민 20명 가운데 4명만 도움을 주었다. 나머지 16명은 응하지 않았다. 

개인 간의 신뢰도 문제지만 정부 신뢰의 추락은 더욱 심각하다.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할 정부부처, 경찰, 법원 등 국가기관 가운데 보통인 5점 이상 받은 곳은 한곳도 없었다. 심지어 시민들이 처음 만난 사람(3.7점)보다도 언론(3.1점), 국회(2.7점), 검찰(3.7점)을 믿지 못한다는 뉴스는 충격적이었다.

사실 이런 뉴스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통계청의 '2019년 사회조사 결과'에서도 국민들 절반이 우리 사회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62.8%), 30대(51.5%) 청년층의 사회에 대한 상대적 불신이 컸다. 우리나라의 공정하지 못한 제도나 시스템을 믿을 수 없다는 국민 정서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신호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대한민국은 온통 진영논리의 덫에 빠져 허우적댔다. 극단과 배제의 정치가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켰다. 당리당략과 포퓰리즘이 발호하면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민생 경제의 끝 모를 추락과 극심한 사회 혼란을 야기했지 않았던가.

한국 사회의 암울한 미래 전망이 반영된 결과는 또 있다. 지난해 11월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 연구소가 발표한 '세계번영지수' 보고서를 살펴보면 한국의 종합순위는 167개국 중 29위로 중상위권을 기록했다. 교육(2위), 보건(4위), 경제의 질(10위) 분야도 준수했다. 다만 사회적 자본 분야는 142위 최하위권으로 바닥권으로 주저 않았다. 전년도(78위) 대비 무려 64단계나 떨어졌다. 2012년 51위에서부터 매년 급격히 하락하는 추세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 구성원간의 신뢰가 생산 활동에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이라는 책을 통해 사회 구성원간의 신뢰와 유대가 사라질 경우 공동체 참여가 결여되고, 사회적 자본이 심각하게 쇠퇴 한다고 경고한다.   

제주사회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생활역사를 갖고 있다. 주민들 간 연대의식이 높고, 협동적 관계가 원만하게 지켜져 왔다. 그럼에도 최근 제주 공동체가 활력을 잃어가면서 도처에서 한숨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제2공항, 동물테마파크 등 크고 작은 갈등 현안으로 도정과 의회, 지역과 계층 간 대립과 반목이 깊어지고 있다. 협치의 실종, 정치 본연의 사회문제 해결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 역시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IMF 이후 사상 최고라는 청년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영세 자영업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형국이다. 감귤, 광어, 월동채소 가격 폭락으로 농가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저소득층 15명 가운데 1명꼴로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문제도 우리 사회의 통합을 발목 잡고 있다. 경자년 새해, 희망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이럴 때일수록 위정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원희룡 도지사는 새해 첫 공식 일정을 제주시 민속오일시장에서 시작했다. 민생 경제 살리기에 올인 하겠다는 각오와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간 추진되었던 경제 정책의 취약점을 살피고, 구호가 아닌 주민들 피부에 와닿는 근본적 대응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아울러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민생 경제 회복과 도민 통합은 불가능하다. 불신과 대결 구도를 신뢰와 공존의 관계로 수정해야 한다. 서로 존중하고 긴밀하게 협력하고 연대하지 않는다면, 더불어 배려하고 나누지 못한다면 당면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경자년 한 해도 악순환만 반복될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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