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제주에서 '느리게' 행복해 지다

'워라벨'문화 확산…이기적이지 않은 삶 중요
우선순위 먼저, '뒤처졌다' 강박부터 버려야
속도감 아닌 '천천히' 삶의 질 채워가는 과정

△ 이미 바쁘고 지친 '한 해'
'2020년'이라고 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미 바쁘다. 그래서 벌써 지치다. 강박에 가까운 습관과 느리면 큰일 일어날 것 불안은 도통 나이를 먹지 않는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욕망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라난다.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다시 '빨리'를 외쳐댄다. 그러니 지칠 수밖에.

비슷한 경험이나 위로의 문장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느리게(SLOW)'다. 멈추거나 뒷걸음치라는 의미보다는 점점 속도를 늦추는 느낌에 가깝다. 정확하게는 '천천히'다. 천천히 산다는 것은 자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빨리'에 익숙해지면서 잃어버린 '즐기는 법'을 찾자는 얘기다.

건강한 먹을 거리를 위해서는 땅에서 자연의 시간에 맞춰 자라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영양소를 해치지 않는 적당한 온도에서 조리를 하고 나눠 먹는 것으로 성취감이나 만족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적어도 한 두 계절을 앞서 세상에 나오는 유명 디자인이나 공장에서 태어난 무수한 닮은 꼴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틀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바늘에 몇 번 찔리기도 하고 원단을 고르거나 꿰매고 엮는 과정을 거치느라 몇 날 밤을 새면 나를 위한 나만의 것을 얻는 쾌감을 얻을 수 있다. '느리게'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뒤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위해 에너지를 쏟는다는 다른 표현이다.

△'걷기'에서 '살아보기'로
누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있다.
속도로 싸우고, 빨리 돈을 벌고 하는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지만 슬쩍 부정적 의미에 물들며 마치 바람처럼 사라지곤 한다.

제주 올레로 시작한 '걷기'문화가 열풍이란 단어에 휩쓸렸던 것을 우리는 안다. 꼬닥꼬닥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피고 문화 원형질까지 더듬어보자고 했지만 어느 순간 '완주'라는 목표를 쫓기 시작했고, 관심이 간절했던 지자체들에서 앞다퉈 걷는 길을 만들어 냈다.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보다 천천히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내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어졌고 무례함에 무감각하게 됐다. 누구도 의도치 않은 일이다.

아쉬움에 빈 자리에 한 달이나 반년, 1년 정도 '살아보자'는 심리가 채워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느리게'는 협력의 존중과 지속가능한 성장, 감사와 회복을 구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려운 의미를 걷어내면 자연, 시간, 사람을 존중하며 느긋함을 알아가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걷기'를 할 수 있지만 그 전에 듣고 기다리는 것에 자신을 길들일 필요가 있다. 

"잠시 쉬어가도, 달라도, 평범해도 괜찮아"를 외치는 청춘으로 채워진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주연 배우나 선정적이거나 화려한 같은 자극적 요인 하나 없이 입소문을 탔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직접 키운 것들로 요리를 해 먹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간을 들일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던 때문이다.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
그러니 묻는다. 일상이여,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어지간한 요리는 전자렌지에 몇 분, 아니면 봉지를 열어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늘 시간이 없다. 대문을 열 필요도 없이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필요한 것을 방문 앞까지 부를 수 있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 인터넷 속도는 이미 기가를 헤아리고 '속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만큼 시간을 쪼개기 어렵다.

시간을 거침없이 쓰기만 했을 뿐이지 '어떻게'를 고민하지 않은 결과다. 흔히 '워라벨'을 장시간 노동을 줄이고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하고 싶은 일'의 우선 순위와 시간 관리라는 핵심을 놓치곤 한다.

'느리게'는 시계가 째깍거리는 것과는 다른 속도감이다. 단순함 혹은 속도를 늦추는 생활도 선택하기 나름이다. 생활 수준을 낮춰 목표하는 것을 달성하거나 쓸데없는 돈을 쓰지 않으면서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는 '다운시프팅'(downshifting)이나 욕망을 내려놓고 취향에 맞춰 검소하게 생활하는 '자발적 단순함'(voluntary simplicity)같은 것들이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아주 많은'느낌을 말한다. 그 것 마저도 각각이 느끼는 차이가 크다.

누군가는 직접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고 자라는 과정에서 느림을 읽고, 누군가는 한적한 돌담을 따라 걷다 푸르게 잘 자란 것들을 보는 느림을 즐길 일이다. 또 누군가는 그렇게 키워진 결과물을 직접 전통시장이나 마트에서 골라 장바구니에 넣고, 자신 또는 누군가를 위한 요리를 하는 느림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잘 차려진 음식을 시간을 들여 음미하는 느림에 만족하는 수도 있다. 당일치기라도 제주를 즐길 수 있어 가슴 벅찰 수도 있고, 발바닥 아래 길을 두는 것에 심장이 뛸 수도 있다. 원하는 자리에 멈춰 서서 '순간'을 담아내는 과정이 기쁜 사람도 있고, 누구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제주의 곳곳을 살핀 보람을 오래 기억할 수도 있다. 그러니 답이 나온다. 일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들게 사는 것이다. 답은 만들기 나름이다. 고 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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