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어느새 입춘이 내일로 바싹 다가서고 보니 어디선가 박태준의「봄의 교향악」이 오케스트라의 감미로운 선율을 타고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 나이에도 젊은 날의 촉촉한 멜랑콜리가 더러 남아있음인지, 이따금 이러한 연상(聯想)이 뇌리를 스칠 때면 눈시울이 젖어온다. 그런가 하면 초록빛 들판을 내닫는 풍선 든 소년을 떠올려보는 등, 꿈결 같은 유토피아의 세계는 우리들의 마음을 젊고 푸르게 한다.  

일상의 삶의 궤적이 쌓여갈수록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다행히 열매가 소담스레 담겨진다면야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랴마는, 되레 회한(悔恨)의 깊이가 날로 더해 간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런들 어쩌랴, 덧없는 가슴에도 언감생심 새봄이 기다려지는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희망을 품는다. 희망의 맞은편 끝은 곧 절망, 일찍이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일컬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던가.  

북풍한설 몰아칠 때 강한 것들만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태산 같은 눈더미를 지붕 삼아 견뎌내는 보리싹이나, 동해(凍害)를 막아내고 마침내 꽃망울을 터트리는 개나리의 인내를 보라. 담 밑의 난초는 폭풍 속에서 머리채가 미친 듯 휘둘려도 꺾이지 않고 자리를 지켜낸다. 올해도 봄은 다시 오는데, 아, 이 봄을 어이 할거나. 봄 처녀 곱게 단장하고 오시듯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녕 축복이려니. 이러한 축복을 차지하고픈 소박한 소망을 품고, 붓 가는 대로 나도 오늘 길을 따라나선다. 

삶이 날로 복잡해진다. 그런 만큼 우리 사회엔 화두도 풍성하고 이슈도 넘쳐난다. 그중에는 '소통'(疏通)이 단연 압권이다. 이제쯤 피로감을 느낄 만도 하건만 소통은 아직 살아있는 회자(膾炙) 거리가 틀림없다. 도심의 하수구가 그렇다면야 모를까, 사람과 사람 사이가 왜 이리 막혀서들 난리인가. 여기엔 과학적 뒷받침이 있으니, 인간의 뇌는 자기가 원치 않는 정보는 차단해 버리는 구조로 돼 있어서 그렇단다.(요로 다케시). 동경대 의대 해부학 교수인 그는 이벽을 '바보의 벽'이라 명명한다. 이 벽을 넘어서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소통에는 명약이 따로 없다. 문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다. 그게 정답은 아닐지 모르나 하나의 시사점은 되리라.

소통과 더불어 새봄을 단장할 또 하나의 화두는 '인연'(因緣)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소통이 창(窓)이요 문이라면, 인연은 줄이요 끈이다. 한평생 살면서 인연을 둘러싼 사연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 이참에 피천득의 수필「인연」을 다시 음미해 본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얘기다. 본디 인연이란 득(得)을 꾀함이 아니라 연(緣)을 귀히 여김이다. 그러기에 인연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그럴진대 인연에는 의(義)와 절(節)이 요체다. 

자, 붓을 따라나선 길이 이쯤에 이르렀다. 매듭을 지으려 주섬주섬하는데 어쩌다 알게 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어휘가 뒤늦게 떠오른다. 이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로,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로마 시대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이 개선 행진을 할 때,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무 자만하지는 말라는 뜻으로, 행렬의 맨 뒤에 있는 노예에게 메멘토 모리를 외치며 따르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여기 개선장군과 노예는 각각 오늘의 누구인가. 한편, 아메리카의 인디언인 나바호족의 메멘토 모리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어도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보렴.' 아, 새봄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메멘토 모리의 여운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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