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의 저자이며 "려운형 추모사업회" 고문인 원로시인 이기형씨(86)가 지난 14일 8·15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온 몽양 여운형 선생의 딸로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인 려원구씨(74)를 57년만에 재회, 그 감격의 순간을 담아 본지에 보내왔다.<편집자주>

미인일지라도, 비록 절세의 미인일지라도 무자비하고 인정사정 없는 세월의 재촉과 중압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그 애 띠고 곱던 얼굴이 저렇듯 주름진 얼굴로 변했을 줄이야!

2002년 8월 14일 오후 한시께 8·15민족통일대회 북측 민간대표단 116명이 우레 같은 환호·박수를 받으며 워커힐호텔 로비에 나타났다. 놀라지 말라, 무려 5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막혔던 분단벽을 민간대표들이 처음으로 뚫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얀 저고리에 연청색 치마차림의 깨끗한 할머니 한 분이 두 젊은 여인의 부축을 받고 행렬에 끼어 인파를 헤치며 걸어간다. 환호와 박수 속에 사진기자들의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몽양 여운형 선생의 셋째 따님 려원구 의장이었다.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 려익구 사무총장이 앞에 서고 당질 려인호씨, 려철연 회장이 뒤따르고 나도 북새통을 헤치며 끼어 들었다. 려익구 사무총장은 지난번 금강산에서 이미 역사적 대면을 했던 터라 구면이었다. 걸으며 주춤대며 총장이 총총히 말했다. “이기형 선생입니다”“이기형입니다. 알아보시겠어요?”“예, 예”머리를 끄덕였다. 순간 두 눈에서 눈물기가 살짝 비쳤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우성 속에 행렬은 지나갔다. 우리들은 멍히 서있었다. 꿈만 같았다.

내가 려원구 학생을 마지막 본 것은 1946년 3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계동 140번지 8호 여선생 댁을 찾아 현관에 들어섰다. 때마침 선생은 둘째딸 연구와 셋째딸 원구의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 입학식에 간다면서 막 떠나려는 참이었다. 둘은 싱글벙글 좋아했다. 선생도 환한 웃음기가 얼굴에 돌았다. 세 딸 모두 잘났지만 특히 셋째 원구는 누가 봐도 미인이었다. 아마 건국 후 미인대회에 나갔더라면 틀림없이 미스코리아에 뽑힐 정도였다. 나는 대문 밖에서 세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이 광경을 본 사람은 아마 남북을 통해 나뿐일 것이다. 그때로부터 57년이라는 민족비운의 세월이 저며갔다. 그 날의 여대생 여원구가 모진 분단벽을 뚫고 옛 고향 서울 천지에 할머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저 얼굴의 주름살이야말로 한 여인이 늙어 가는 표정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겨레가 겪는 전무후무한 수난의 표정이 아니겠는가.

그 날 저녁, 나는 환영만찬에 초빙되어 말석에 끼었다. 테이블은 달랐지만 나는 의장 테이블을 찾아가 정식으로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건강을 물은 다음 14년 전에 일본을 통해 보낸 “「몽양 여운형」을 받아 보았는가”라고 물었더니 “잘 읽었다”고 대답했다. 나도“언니가 쓴 아버님 전기를 잘 읽었다”고 말했다. 내 가족에 대해서 거명해 물었더니 모두 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우리 어머님에 대해선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님은 금년에 백여섯이시다. 이 아들을 만나지 않고는 돌아가시지 않는다고 나는 신앙처럼 믿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내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 말도 묻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옛날에는 참 미인이었는데…” “지금은 늙어 미워졌지요?”라고 반농담조로 받았다. “아뇨, 주름에 가렸을 뿐 지금도 본바탕의 아름다움은 여전합니다”라며 의장은 대답 대신 웃었다. 묻고 싶은 이야기는 태산이지만 기다리는 다음 손님을 위해 나는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지난 57년간의 민족수난사가 가슴에 파노라마 쳤다.<이기형·시인·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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