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은 제주대 행정학과 교수·논설위원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역사상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지금과 같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필자의 기억 속에도 결핍의 기억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그 당시엔 국민학교였다)에는 매달 학교에 '육성회비'라는 것을 내야 했었다.

노란 종이봉투처럼 생긴 용지에 매달 육성회비를 담아서 내면 완납 도장을 찍어주었는데,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인데도 내지 못하는 친구들이 몇 명씩 꼭 있어서 월말쯤이면 담임선생님이 호명하여 뒤에 벌세워놓거나 심지어는 집에 돌려보내는 일도 있었다. 금전적인 궁핍뿐만 아니라 학생인권 존중에 대한 의식조차 부족했던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취학연령의 아동이 급증하면서 학교와 교실도 부족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 반이 70명인 콩나물교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교실 때문에 초등학교 저학년들은 2부제(오전반 오후반) 수업을 실시하였다. 지금이라면 세 반 정도의 규모에 가까운 어린아이들을 한 교실에 모아놓고 수업을 했으나 그냥 그땐 누구나 그랬으니 열악한 교육환경이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다.

생필품이나 교재도 부족했던 시절이 있었다. 북한이 파내려온 땅굴이 발견되거나 북한의 침공 위협이 있울 때면 동네 가게에는 라면과 설탕 등이 떨어지는 일이 흔했다.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도 동네 문방구를 몇 군데 돌아야 겨우 살 수 있는 경우가 많았고 새 교과서를 사지 못하는 후배들을 위해 다 쓴 교과서를 물려주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고학년이 되어 도시락을 싸 가게 되면서는 담임선생님이 주기적으로 '혼식검사'라는 것을 했다.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가 쌀이 자급자족되지 않는 국가였고, 쌀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분식(混粉食)을 장려했었다.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면 일제히 도시락을 펴고 잡곡섞인 밥을 싸왔는지 선생님이 일일이 검사를 했었다. 

지금의 우리는 집근처 가까이에 편의점이 몇 개씩 있어 필요한 생필품은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무엇인가 생필품을 손에 넣을 수 없는 결핍상황에 익숙하지 않아진 듯하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그렇다.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라떼('나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소위 '꼰대'를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부른다)' 취급을 받겠지만 필자 또래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팩트들임에 틀림없다. 아마 필자보다 조금 더 윗세대에게는 정도가 더 강한 기억도 있을 것이다.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하면서, 올 초에 인터넷에는 마스크 부족을 겪고 있는 중국인들의 사진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생수용기나 기저귀를 뒤집어 쓴 사람들의 사진으로부터 여성용 속옷을 잘라 만든 마스크까지, 다양한 대체품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누기꾼들은 신기하고 재미있다, 마스크도 없다니 안됐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게 되면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설 명절이 지나고 나자 코로나가 전국을 강타하게 되었고, 사상초유의 개강연기 사태가 벌어졌다. 필자의 학교도 2주 개강연기를 하면서 전 교직원에게 근무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그런데 동네 어디에서도 마스크를 살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며칠 전 통화에서 서울에 계신 필자의 어머니가 대형마트에 가서 줄을 서서 마스크를 한 통 사놓았다고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혹여나 출근하는 자식이 마스크가 없어 고약한 병에 걸릴까봐 걱정이 되셨던 게다. 추운날씨에 바깥에서 오랜 시간 줄서다 오히려 병나실까봐, 학교에서 지급해 주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시며 다행이라고 안심하셨다. 

오늘의 결핍 또한 분명히 극복될 것이다. 다만 이 경험으로부터 대한민국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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