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평론가·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

최근의 일이다. 길을 가다 <흑백사진관>이란 입간판이 길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한동안 그 앞에 서서 묘한 감정에 젖은 일이 있다. 아마도 증명사진 같은 것을 속성으로 찍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흑백사진이란 말이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무언가 잃어버렸던 것을 오랜만에 찾은 것 같은 반가움이 교차했다. 

흑백사진이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자취를 감춘 지도 어언 반세기는 지나지 않았을까. 70년대 사진첩을 보면 초반에는 흑백사진이었는데 후반에 오면서는 언제 사라진지 모르게 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흑백사진이란 말 자체가 무슨 골동품처럼 들리며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존재가 됐다. 컬러필름이 나오고 디지털시대가 도래하면서 흑백사진은 전문 사진작가들에서나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을 뿐 일반의 생활 속에선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컬러로 대변된 현대 사진은 바야흐로 그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물론 디지털이다. 관광지가 아니라도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먹기 전에 찍는 것을 보면서 사진의 보편화를 실감하게 된다. 과거엔 사진은 사진관에 가야 찍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가벼운 사진기가 보급되고 스마트 폰이 일반화되면서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디지털시대의 총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진 고유의 예술성

사진이 등장한 지도 200년이 되었고 예술로서 사진이 확고한 위상을 획득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다소의 우여곡절도 있었다. 50년대 우리나라 대표적 전람회인 <국전>에 사진부를 신설해달라는 사진작가들의 요구가 팽배했었다. 이상하게 건축부는 설치되었는데 사진은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화가가 찰카닥도 예술이냐고 빈정댄 적이 있었다. 번거로운 수공업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른 예술에 비해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까 어떻게 그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야말로 사진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사진의 역사>를 쓴 보먼트 뉴홀은 "회화가 아니라 바로 사진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것은 진실의 재현"이라고 하였으며 "화가는 상상력이라는 힘으로 구성하지만 사진가는 즉각적 판단에 따라 해석한다."고 하였다. 회화와 사진은 전혀 다른 영역이며 전혀 다른 프로세스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처음 사진이 등장했을 때 그 정확한 사실적 구현에 도저히 회화가 따라갈 수 없다고 보았다. 조만간 회화는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를 만든다고 했듯이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회화는 회화 본연의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후기 인상파를 거처 입체파. 표현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추상미술에 이르는 20세기 회화의 눈부신 발전은 사진의 등장이 하나의 촉매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르네상스 이후 회화가 가장 위대한 시대를 연 것이 되었으니 오히려 사진의 등장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회화와 사진은 적대적인 관계보다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사진은 사진으로서의 길, 회화는 회화로서의 길을 찾는 것 못지않게 상호보완의 역할 즉 사진은 회화에 회화는 사진에 영감을 주었던 사실을 결코 가볍게 치부할 수 없다. 

사진의 일반화 내지 보편화는 그런 만큼 사진 고유의 예술성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것은 누구도 찍을 수 없는 고유성을 그만큼 휘발시키는 것은 아닌가. 디지털 데이터로 된 사진 가운데서 사진 고유의 예술성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은 컬러의 보편성이 사진의 본래적 속성, 즉 사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진실을 그만큼 상쇄시켜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어쩐지 디지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간의 깊이, 안으로 깊어지는 여운은 흑백사진에서만 느껴지니 말이다. <흑백사진관>의 간판 앞에서 잠시나마 마음의 여정(旅情)을 느끼게 된 것도 이에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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