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근 아라요양병원장·논설위원

지난 2월 말로 60년 넘게 지속된 내 봉사활동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59년 오월의 어느 날,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 선생이셨던 오윤겸(당시는 오만수) 선생님께서 학교에 도서실을 만들게 되었으니 도서위원으로 봉사하여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그 후 학교 일과가 끝나면 학교에 남아 2800여 권의 책을 분류하고, 라벨을 붙이며, 대출카드를 작성하였다. 9월 28일에 개관한 후에는 일주일에 하루 방과 후부터 밤 11시까지 도서실에 남아 사서 역할을 하였다. 덕택에 졸업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의과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적십자 활동을 하였다. 학기 중에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응급처치법을 강의하고 방학 중에는 무의촌진료를 갔다. 봉사 시간이 1000시간이 넘었다고 적십자 총재의 표창을 받았다.

군의관 시절에는 마지막 20개월을 고향의 제주경비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어 남군 지역의 무의촌 진료에 진력하여 제주도지사의 감사장을 받았다.

레지던트 시절에는 6개월 동안 강릉도립병원에 파견 나갔는데 근무에 모범적이었다고 강원도지사 표창장을 받았다.

조선대학교의과대학 교수 시절에는 학생들과 레지던트들의 교육과 호남지역의 영상의학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학생과 병원 그리고 학회의 감사장들을 받을 수 있었다.

1979년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제주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하는 것으로 봉사 대열에 참가한 이후 이듬해에 제주도의사회에 윤리위원회 간사를 시작으로 30년 넘게 관여하였고, 동려야간학교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졸업식 후 교사와 학생들에게 자장면을 사 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학생들을 스카우트 대원으로 등록하면서 단복을 마련하여 주고 라이온스클럽에서 주신 봉사금으로 기금을 만들기 시작하고 아들 종석이가 MBC 장학퀴즈 기장원이 되면서 받은 6년 동안의 대학수업료 전액과 '퀴즈가 좋다'에서 달인이 되어 받은 상금 전액 및 후원자들께서 모아주신 기금을 기반으로 280여 평이나 되는 교실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었다. 

한국병원 개원과 함께 시작된 스카우트 활동과 어린이재단 후원도 또 다른 보람이었다. 스카우트회관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회관을 마련하였으며, 어린이재단에 30년 이상 계속 후원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명예의 전당 등재에 형제가 함께 올라간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1995년에 한마음병원 설립을 추진하면서 지방선거에서 신구법지사가 당선되도록 하는데 일조를 한 것도 보람된 일이었으며, 잇따라 제주문화원 창립에 참여하고 제주국제협의회와 제주국제관악제에 가입하여 활동의 범위를 넓힌 것도 뜻깊은 일이었다.

한마음병원 개원과 함께 시작한 제주시자원봉사단체협의회의 창립은 우리 제주도의 봉사활동을 활성화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고태언 사무국장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제주도협의회장 겸 센터장을 맡고 있다가 그에게 센터장을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한마음병원장을 물러나면서 맡게 된 김영갑갤러리가 이제 본 궤도에 올라선 것도 기쁜 일이고, 현명관 회장과 김수종 주필의 부탁으로 시작한 HRA로 많은 인재를 키울 수 있었던 것도 보람찬 일이다.

되돌아보면 이상하게도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봉사활동과 인연을 맺게 되고, 그 일들이 도민들의 도움으로 빠른 시간 안에 제자리를 잡게 되어 나에게는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한 봉사활동이 오히려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내가 도민들의 사랑을 받도록 하여 나로 하여금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라요양병원을 시작하면서 맡게 된 제주도자원봉사협의회장 덕분으로 봉사에 관해 강연을 할 기회가 많았었는데 이런 나의 경험이 자신 있게 봉사자들에게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권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제주도민의 25%가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좀 더 많은 분들이 봉사활동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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