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이학박사·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국제간에 분쟁이 시작'됐다. 그중에서 동남아시아에 자리한 '베트남(vietnam)으로 눈길'이 모아진다. 예고 없는 상황에서, 한국항공기의 착륙을 불허(不許)하는 한편, 300명에 가까운 여행객을 억류(抑留)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외교상의 큰 결례(缺禮)임으로 '억하심정(抑何心情)이 없고서, 일어날 수없는 일이다. 베트남은 '월남(越南)으로 통용'하면서, 인도차이나반도에 자리해있다. 

이와 같이 원거리에 놓인 탓인지, 우리나라와는 '역사적으로 접촉기회'마저, 갖지 못해 왔다. 다만 경제적 풍요시대를 맞이해서, 우리나라를 향해 '노동이민이 다가왔음'으로, 농촌에서도 낯설지 않게 됐다. 이들 나라영토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그런 관계로 인접한 중국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안남(安南)으로 통용'해왔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중국영향권에 포함된 나라인 것'이 입증된다. 

하지만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표현'하듯, 서구(西歐)세력이 동양을 향하고 있을 때, 프랑스신민지로 전락했다. 이후에 태평양을 향해서, 남방(南方)정책을 펼쳐온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됐음으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어온 모습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호지명(胡志明)이 주도하는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는데, 이것역시 '인접한 중국영향'을 받아온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남쪽으로 미국세력이 진입(進入)하면서, 상황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해양진출이 막히면서 '남북 간에 분할구도'를 낳았기 때문이다. 결국 제네바협정에 의해서 '위도17도를 경계'로 삼고, 이념(理念)과 체제(體制)에서 달리하는 한편, 사이공과 하노이에 걸쳐 '정치적 중심지'마저, 양립(兩立)하게 됐다.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의 실상(situation)을 재현'하듯, 분단(分斷)국의 전형을 보였다. 

이때에 미국세력에 반대한 것이 호지명이었고, 그가 주도하는 '베트콩(viet cong)이 창궐(猖獗)'하면서, 자유진영과 대립각을 세우며 '전쟁으로 발전'하게 됐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미국은 6-25동란을 기해서 '혈맹(血盟)관계를 맺어온 한국'으로, 파병(派兵)을 요청해왔다. 이것이 1964년인데, 한국은 즉각적 조치로서 '채명신(蔡命信)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부대이름마저 맹호(猛虎)를 앞세웠다. 

지나칠 수없는 것은 이후에 다가온 '채장군의 수범(垂範)적 행동'이며 조치였다. 서울의 현충(顯忠)원에는 '국군묘역이 조성'됐는데, 사병(士兵)과 장군묘역이 구분됐으며 '규모는 물론 매장(埋葬)방식'에서, 서로는 달리하고 있었다. 채(蔡)장군은 모든 특혜를 버리고 '화장(火葬)을 통하여, 자신을 '1평(坪)규모의 사병묘역'에 안장하도록, 유언장을 남겨놨음으로 월남전에 있었던 '전우애(戰友愛)의 시범'을 보여 온데, 따른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편성된 '9연대소대(小隊)장으로 복무'할 당시, 불순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해준 '제주도출신사병들의 전우애'에 대해서, 평생토록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려는 선심(善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채(蔡)장군이 펼쳐온 또 다른 공적은 '미국을 향해 대량이민(migrants)의 시발점'을 열어온 점이다. 당시 월남전에는 미군부상자가 많았고, 이를 치료하는데 주력해온 것이 한국군의(軍醫)관들이었다.

당시군의관들은 '대학을 막 졸업한 새내기'들이며, 제주출신도 많았다. 하지만 생사(生死)의 갈림길인 전쟁터에서, 치료경험을 통한 '노하우(know how)의 축적'을 통해 '수많은 미군생명을 구제'하는데, 기여해온 것이 확실하다. 이런 공적을 높게 평가받으면서, 철수과정을 통해 '미군과 함께 집단이민의 특혜'를 받게 됐다. 이것이 '미국을 향해서 이민 길'에 오르며 '오늘의 붐을 조성'한 계기가 됐음으로, 인과응보의 고전(古典)지혜를 떠올리며,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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