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식 제주어육성보전위원·시인·논설위원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자는 아름다움이 넘치는 특별한 존재로 인식된 시절도 있었다. 있다고 하고 싶어도 남녀는 동등하므로 육체파 혹은 관능미, 섹스의 아이콘니라든지 믿을 수 있는 곰보다는 속아도 반달눈을 가진 여우가 좋다는 은유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세상이 왔다.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 눈물로 보낸다. 그리워도 기다려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남자는 여자를 보살펴야 했지만 애초에 그런 차별을 해선 안 되는 시대가 왔다. 왔다가 아니다. 바로 그런 시대다. 그래서 몇 십 년 전만 해도 불쌍한 어머니를 돕기 위하여 성공해야 한다는 착한 아들도 많았다. 세상의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이런 아들이나 딸을 낳은 여자는 어머니다. 살다보면 죄를 짓기도 하는데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며 은혜를 배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

원시시대에는 밀림이나 동굴 깊숙한 곳에서 살아야 했기에 힘센 남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옛날 제주도 속담에 '여자는 익은 음식이므로 맹심허영 가냥허야사 헌다.' 는 말을 들었다. 커서 제주어로 시를 쓰면서 여자는 즉석불고기라는 형편없는 생각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의 신체 구조는 속에 감추어져 있다. 남자의 구조는 돌출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내성적인 수가 많아서 남자는 정중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허락을 받고 행동으로 실행하기 보다는 아니면 말고 라는 돌발적인, 야성적인, 상황에 따라서는 야만적인 의사표시로 욕망을 들어낼 때도 많았다.

그때는 여자를 예술작품이나 문학 따위로 상당히 활용했던 시절이라서 더 그러했다. 비교적 인쇄기계가 좋은 신문사에 연재하는 소설을 읽노라면 남녀의 관계를 섬세하게 표현한 날도 있었고, 누드화 모델도 거의 다 여자였다. 국산영화도 시대를 반영하느라고 그랬는지 겁탈하는 장면을 삽입한 저급한 시나리오도 많았는데 지금은 비약적인 발전으로 한국영화는 세계적인 종합예술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 보니 더러 정상 참작이 드물어서 내성적인 여자는 가만히 있었는데 남자가 하자는 대로 했다가 똑 같이 간통죄로 쇠고랑을 찼던 것이다. 서로 안타까웠고 세상이 부끄러워서 남이 고발을 취하하면 묵인된 사연으로 끝나는 사건도 많았다. 그래서 육 개월 전에 저지른 불륜의 실질적인 행위는 입건이 드물었고, 간통죄도 2년 이내의 징역에 처한다는 법정 최고형에 따라 몇 개월 정도의 형기를 마치면 없었던 일로 그 남녀의 사랑에게 면죄부를 주는 사례도 많았다. 그래서 법정을 나오면서 육 개월 정도만 참자고 서로 격려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었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면 스킨십도 위험하다. 직위를 이용하여 원하지도 않는 만용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실수했다가는 남자는 큰일 나는 시대가 왔다. 미투가 코로나 바이러스 19보다 먼저 자리를 잡은 거다.

미투(Me Too)란 '나도 고발한다.'는 뜻으로,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며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우리는 함께 연대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강한 사회정의라서 폐지된 간통제와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 만나 통성명만 해도 끌어안고 아슬아슬하게 입술이 맞닿지 않으면서도 얼굴을 비벼대도 허용된 스킨십이라서 다들 그렇게 하는가?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닌 모양이다.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는지 추이를 예상해야 하므로 여자를 만났을 때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름답다는 미적 표현보다는 인격을 존중해야 하므로 예의를 지키려면 긴장해야 한다. 사귀다보면 싫어질 수도 있어 헤어질 때 그간의 행적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므로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몇 년에 저지른 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여자는 강한 남성에게 집중하고 남자는 많은 여성을 원한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아무튼 세계적인 인구 감소가 시대적인 현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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