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다. 선거철 그림이 이번에는 좀 다르리라 생각했다. 총선시민연대가 뜨고, 낙천·낙선운동이 벌어져서이기도 했고, 「바꿔」라는 노래가 유행하는 때문이기도 했다. 새천년이라는 상징적 시점을 넘긴 판에 무언가 기분좋은 변화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꼴인가? 이합집산하는 정치판, 오락가락하는 정치철새들, 난무하는 감정적 발언, 코메디같은 세몰이 행사들. 역시, 선거철이면 벌어졌던 일들이 또 벌어지고 있다. TV 뉴스보기도 지겹고, 신문읽기도 지겹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가지가 더해졌을 뿐이다. 선거철의 단골 메뉴에 총선시민연대의 움직임이 새롭게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전의 메뉴가 변함없는 것을 보면 총선시민연대라는 새 메뉴는 정치판을 바꾸는 큰 변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부터 앞선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기대를 쉽게 저버리지는 못한다. 비록 메뉴는 변함없이 진부한 것일지라도 결과를 보기 전에는 비관할 수 없으니 말이다. 정치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이 커졌다고도 하고, 정치문화를 바꾸고자 하는 시민운동이 헛농사만 지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대의 틈새에서 자꾸 자괴감이 자란다. 어떤 정치인이 사석에서 내뱉은 말이 뱅뱅 귓전을 울려서이다. 그는 정치판의 추잡한 행태를 정치권의 탓으로 돌리는 좌중의 비난에 대해 분개하며 말했다. 정치인 탓만 하지 말라고, 정치인들도 바보는 아니라고, 유권자들의 수준에 맞출 수밖에 더 있냐고 말이다. 요컨대 그의 말은 물량공세, 선심공세, 지역이기주의·연고주의 등의 집단감정에의 호소가 통하는 유권자가 아직은 더 많다는 것이다. 도무지 수긍하고 싶잖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부정하기 어려운 말이다.

자괴감의 또 다른 원인은 바꿔야 할 대상이 선명치 않다는 점이다. 「바꿔」라는 슬로건이 내포하는 의미는 많다. 정치적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자는 의미이고, 타락된 돈선거를 없애자는 의미이고, 함량미달의 정치인을 떨어뜨리자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출마자 전원이 제 만큼씩의 연줄과 금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각기 제 만큼씩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면 선량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문제는 공약인데, 다들 비슷비슷한 공약들을 내놓는다면? 유권자들이 지방의회에서 다루어야 할 정도의 의제를 총선에서 요구하고, 그리하여 그 요구에 부응하는 공약들이 경쟁하듯 남발된다면? 사실 벌써부터 떠돌고 있는 말이나 그 행태들이 이러한 우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황인데, 누구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문득 추잡한 정치판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본다. 첫째는 부조리 속에서도 권력의 부가가치를 얻기 위해 시류에 편승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조리의 원인을 정치인에게 돌리며 악악대기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조리가 바로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부조리의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첫째 전략은 자기이익에만 충실한 것으로서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둘째는 네 탓 타령인 셈이고, 셋째는 내 탓 타령인 셈이다.

코앞의 자기이익에 충실하기는 쉽다. 또 네 탓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이중전략도 쉽다. 사실 우리의 정치문화가 구태를 답습하는 것은 네 탓이라는 비난의 잣대와 자기이익의 잣대를 편리한대로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마자들이 연고를 찾는 발걸음이 잦을 수밖에 없고, 선심성공약을 남발하는 것이고, 선거비용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한 정치인의 유권자 수준 운운을 전면부정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결국 선거철의 꼴볼견을 다시 보지 않을 궁극적인 해결책은 셋째전략이다. 정치판의 추잡함이 유권자만의 탓이겠냐마는, 내 탓의 몫을 인정하는 유권자는 적어도 이중잣대는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하순애·제주문화포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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