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섭 덕성여대 불문과 명예교수

우리는 이 문제를 색미와 식미 두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몸을 색(色)이라고 한다.몸에서 '세계로 난 창'인 다섯가지 감각기관(눈/귀/코/입/피부)이 외부세계(빛/소리/냄새/맛/접촉)를 만나면서 인간은 세계를 파악한다. 외부세계와 만물(萬物)도 색이다. 각각의 감각기관은 아름다운 것, 듣기 좋은 것, 향기로운 것, 맛있는 것 그리고 부드러운 것을 추구하는데,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감미로와서"(수타니파타) 지나치게 갈망하고 집착하는 데에서 사달이 난다. 비근한 예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맛의 유혹에 시달린다. 그리고 어떤 이는  평생을 자신의 두 눈에 속고 살아왔다고 개탄해 마지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흔히 '다섯 도둑'이라는 비유를 드는데, 색을 좋아하는 것은 실은 괴로움을 좋아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대상의  빛과 소리에 홀린 나머지 정작 대상 자체를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코브라의 꼬리를 잡고 있는 줄도 모르고 욕망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색미(色迷)라고 한다. 색미에 빠져있을 때, 즉 다섯 도둑에 사로잡혀 있을 때, 마치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는 형국이어서 이런 상태에서는 올바른 견해가 나올 수 없어 반드시 불행에 빠지게 된다. 갈망과 집착은 정신을 약화시킨다. 유감스럽게도 요즘의 TV는 색미를 부채질하는 데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진부한 감탄과 상투적 표현, 억지 웃음을 강요하는 잡담 프로그램이 어찌도 그리 난무하는지 방송심의위원회 있는지, 있다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멋대로 떠오르는 자기의 생각을 당연시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에 자신이 속는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그 결과,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주관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이다.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사람은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 또한 주위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의 일면만 보고 "이 친구 형편없군!"이라고 쉽게 단정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렇듯 편견과 어설픈 경험에서 비롯된 선입견으로 인해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는 것을 식미(識迷)라고 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험하다. 사람들은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그것이 만일 잘못된 신념이라면?확신에 따른 행동이 차후에 왜곡된 사실과 맹신에 의한 어리석은 짓으로 밝혀진 사례로 역사는 차고 넘친다. 중세의 마녀사냥,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유대인대학살),중공 문화혁명의 만행,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전사들은 모두 잘못된 신념으로 인류에 해를 끼친 사례들이다.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판단해서 생겨난 잘못된 신념은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져 세상에 피해를 입힌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은  예외없이 정치지도자들이 식미에 빠진 결과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색미와 식미가 전도몽상(顚倒夢想)을 낳는다.앞뒤가 뒤바뀐 꿈같은 생각이다. 인간은 밤에만 꿈을 꾸지 않는다. 벌건 대낮에도 꿈을 꾼다. 면도칼에 묻어 있는 꿀을 탐하는 것처럼,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찿으려는 끝없는 시도 때문에 고통을 자초한다. 

유감스럽게도 지도급 인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망언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바로 전도몽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 저자 시오노 나나미 씨는 신문 인터뷰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돼선 안된다."고 단언한다. 정치지도자들이 전도몽상에 빠져있다면 그런 사회나 국가의 미래는 암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위에서도 말했듯이 왜곡된 사실에 기초한 잘못된 믿음은 반드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올바른 행동, 올바른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여실지견(如實智見),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대체로 우리는 사물을 순수하게 지각하지 않고, 식미와 색미를 덧씌워서 보기 때문에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영어에서 '보다(see)'는 '이해하다(understand)'와 같은 뜻으로 쓰이므로 잘못 본다는 것은 잘못 이해한다는 말이다.

"사물 자체로!"를 구호로 삼는 현상학(現象學)은 여실지견의 중요성을 인식한 학문이다. 
여실지견의 안목으로 볼 때 풀 한 포기도 태양과 바람, 물,흙 등 전 우주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은 곧 진리다. 그러나 '사실'은 꾸며진 사실인 경우가 많다. '날조된 사건'이 양산되는 사회는 오히려 혈거시대만도 못하다. 

나의 믿음이 올바른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내가 사물과 현상을 올바르게 보고 있는지, 전도몽상이 아니라 여실지견하고 있는지 두렵게 자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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