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이학박사·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서울서북쪽으로 홍제(弘濟)천이 흐른다.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다. 중요한 것은 '청정(purity)하천의 상징'으로 여겨온 점에 있다. 도성(都城)밖에 놓이면서, 주산(主山)으로 알려진 '북한산기슭에 자리한 사실'과도 관계된다. 이를 입증하듯, 이곳에는 세검정(洗劍亭)이 세워져있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때에 '정의로운 칼날을 씻어낸 곳'이란 뜻이 담겨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는 판서와 비변사(備邊司)를 겸임해온 '김상헌(金尙憲)의 발자취'가 겹쳐있다. 당사자는 '청나라와 화의(和議)를 반대'해온 강인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러한 올곧은 지조로 하여금 '심양으로 끌려간 불운(不運)'을 겪었다. 이때에 읊은 시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이다. 외국으로 강제이송당할 때에 느꼈던 '처절한 심경을 표현'한 글귀다.   

이국(異國)땅에 도착해서도 '충절(忠節)만큼은 굳건하게 지켜'왔다. 여기에 감동했는지, 청인(淸人)들도 끝내 귀국조치로 이어졌다. 이때에 강제이송(移送)했던 젊은 여인들도, 동반귀국하게 됐는데 '환향(還鄕)여로 비하'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귀국한 다음에도, 사회와 거리를 둔 채로 차단막에서 집단생활하며, 세신(洗身)으로 '오염물질을 제거'하는데, 힘써왔다. 이곳이 맑은 물이 흐르는 홍제천변이고 '세척(wash)에 주력'해온 청결(淸潔)방법이었다.  

그만큼이나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놓인 백성들을, 속세와 차단하면서도 '홍익정신을 발휘'해왔음으로, 단군이래로 펼쳐온 포용력이다. 이때를 기해서 '홍제(弘濟)와 홍은(弘恩)이란 이름'이 등장했는데 '구제(救濟)를 통하여 백성에게 이로움을 안겨준다'는 뜻이 담겨있다. 민족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도덕규범이다. 이런 전통은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온전한 상태로 이어졌다.  

근대화과정에서 '폐렴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屍身)마저 '홍제천변의 화장(火葬)터'에서 처리하며, 집단사회와 격리해왔음으로 '시대상과 관련된 오염방지책'이었다. 손을 씻으며 사회와 거리를 두는 '오늘의 코로나대비책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는 내면에 담겨진 미덕(美德)에 우선해왔음으로, 실질을 강조하는 '오늘의 과학사조와 차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한계를 보여 온 오늘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기대응의 미숙과 혼선'으로 인하여, 감염확산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다시 '대내외적 불신(不信)'을 낳게 했음으로, 이에 대해서 묵과할 수 없게 됐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도록, 만들어 놓은 형국이다. 초기대응에서 미숙하고, 안일(安逸)에 젖은 것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암시로 다가오는 것이 '냉정한 판단을 통하여 합당한 실행'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만든 점이다. 

이것이 입국(入國)금지마저 외면하면서 '일시적 혼선'을 낳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에서 '얻어낸 경험적 지혜'를 떠올리면서, 새로운 각오와 더불어 앞을 향해 전진해왔음으로, 코로나를 향한 대응조치에서 '시범국가의 위상'을 굳히게 됐다. 여기에다 치료분야를 주도해온 의사와 간호사들마저 '앞장서 현지로 달려'가면서, 봉사를 통해 솔선수범을 보이는 한편 '후원금위탁자들도 줄을 있는 상황'에 놓였다. 

미래를 향한 '국가차원의 희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것이 칠전팔기(七顚八起)에서 얻어낸 '경험적 지혜'이면서, 한민족만이 갖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이다. 여기에 근거한 것인지, 예전부터 우리나라를 '동방의 군자(君子)국으로 칭송'하며, 주변의 부러움을 사왔다. 여기에 근거하더라도 자부심을 갖고, 희망찬 설계로서 앞을 향해서 꾸준히 달려가며 '도약(跳躍)상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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