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평론가·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논설위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더니 올봄이야말로 봄 같지 않게 지나갔다. T. S.엘리엇의 "4월은 잔인한 달"도 넘어 입하(立夏)가 지났는데도 공포와 불안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막연함이 우리 생활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대체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방어적 기제들이 눈에 띄어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된다. 신조어 남발로 인한 새로운 상황의 대치도 그 가운데 하나다. 

팬데믹을 비롯 비대면, 사회적 거리, 생활 속 거리, 코로나 블루, 재택근무, 드라이브 스루, 마스크 패션, 집콕 등 뉴스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외계인이 된다. 사회적 거리, 생활 속 거리니 했을 때 처음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외래어 직역이라서 더욱 생소했다. 사람 사이 일정한 거리 두기라고 했으면 쉽게 이해됐을 것을 왜 이렇게 생경한 관념어로 혼란스럽게 하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비하면 집콕은 순수 우리말이어서 친근하다. 처음 들어도 말과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른다. 일종의 자가격리인데 명령조의 자가격리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집 속에 파묻혀 텔레비전을 보든가 독서를 하든가 아니면 클래식을 듣는 사람의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표상되니 말이다. 어떤 압력에 의한 것이기보다 번잡한 세상살이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정신위생상 얼마나 건강한 대처 방법인가. 자기를 되돌아보는 일종의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은 더없는 치유 방법이다. 미국은 코로나19로 힙합보다 클래식을 즐겨듣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위기가 기회라고 했듯 우리도 고전이나 클래식에 심취해 보면 어떨까.  
코로나19로 일어난 변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리 풍경이다. 겨울이면 감기 때문에 가끔 마스크를 쓴 사람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온통 마스크로 뒤덮인 현상은 없었다.

방역 필수조건으로 마스크 쓰기, 손 씻기, 사람과 일정 거리 두기를 들고 있다. 우리나라가 방역 모범국가가 된 것도 방역 수칙을 충실히 지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로나19 초기엔 마스크를 조달하지 못해 세계적 대혼란을 겪었다. 지금도 배급제이긴 하나 초기의 혼란 상태는 벗어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스크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과거에 마스크는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남을 배려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내 침이 타인에게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대의 예의요 상식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남을 배려하지 않는 부도덕한 처사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버스나 택시도 마스크 미착용자는 승차를 못 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스크도 방역 도구인 한 백색이 기본이다. 그런데 파랑, 검은색이 등장하더니 근래엔 옅은 브라운과 회색이 보이는가 하면 여러 문양이 들어간 것도 보인다. 이쯤 되면 마스크 패션이라고 할 만하다. 백색이 익명성, 무명성을 강조하는 반면 여타 색깔은 그 나름 개성을 띄는 것이다. 모양도 일률적이 아니라 디자인화 되고 있다. 얼굴 일부를 가리는 도구지만 의상 전체에 변화를 유도하는 기능을 간과할 수 없다. 검정색 정장에 흰 마스크가 가하는 신선한 조화나 흰 와이셔츠에 검정이나 푸른색 마스크가 주는 변화의 신선함은 얼마나 개성적인가. 이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심술궂은 코로나19도 제풀에 꺾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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