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이학박사·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클로버(clover)는 여름에 꽃피우며, 전성기를 맞는 식물(植物)이지만, 이름부터가 낯설다. 원산지가 유럽이면서 '정착역사가 짧은'데 따른 것이다. 형태상의 특징은 '3개의 잎이 펼쳐'있다. 그렇기 때문에 '4개의 잎이 달릴'경우, 희소가치를 발휘하면서 '로또복권처럼 행운의 상징물'로 평가해왔다. 적십자(red cross)를 탄생시킨 것도, 이런데 연유하여 '네 잎을 상징물'로, 앞세우게 됐다.    

뒤낭(Dunant)은 '노벨평화상을 처음수상한 사람'이다. 적십자사를 창립하는 한편, 전시(戰時)에도 적을 의식하지 않은 채, 부상당한 병사와 포로들까지 보호하며, 국제협력을 강조해온 업적을, 높게 평가한데 따른 것이다. 이때에 상징물로 앞세운 것이 "십자(十字)모양의 마크"이다. 적(赤)십자병원도 같은 맥락이면서, 인도(人道)-공정-중립-봉사 등의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동란 때에는 적십자병원이 서귀포를 향해서 피난해왔다. 중앙무대의 적십자문화가 최남단을 향해서, 확산(擴散)해온 모습이다. 이것은 주민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됐는데, 당시고교1년생에게서 벌어졌다. 한사람은 '급성맹장염수술로서 생명구제의 행운'을 맞았다. 이것이 당사자로 하여금 '평생에 걸쳐 행운이 따를 것'이란 환상(幻想)에 젖게 만들었다.    

다른 두 사람의 경우, 적십자소년단(red cross youngman)으로 '봉사활동에 주력'하게 됐다. 시대상은 '화순(和順)항을 통해서 LST를 이용한 피난민들'이 길을 메우고 있을 때였다. 대열(隊列)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국민방위병사'들이 포함됐는데, 그들의 갖는 당장의 고통은 '이와 벼룩 등의 해충'에 있었다. 이때의 해충제거방법은 '수동식분무기를 이용한 DDT살포'였다. 

살포현장에는 적십자소년단으로 선발된 '둘만의 모범생'이 있었음으로, 작업진행에서 '고통의 정도를 상상하는 자체'가 어렵지 않게 됐다. 사전훈련이 없었던 것은 물론 '방독(防毒)마스크마저, 확보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 수천(數千)명의 장병에게, 독성이 있는 약품살포란 '당장의 육체고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검은 색깔의 교복마저 '하얀 색깔로 변색(變色)'될 정도였다. 

중요한 것은 DDT의 경우, 이후에 '독극물(毒劇物)로서 세계가 인정'하며, 사용금지해왔음으로 이에 대한 '부정(negative)적 영향'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잔류(殘溜)독성이 '소멸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점'이다. 이것이 요인으로 작용했는지, 살포현장에 있었던 A군은 평생을 통하여, 원인모르는 '병약(病弱)한 신세'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일찍부터 환경에 눈을 뜨면서 '관련분야의 학자'로서, 위상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동반자위치에 있었던 B군의 경우, 재일교포인 형들의 불음을 받고 '일본유학길에 올라'섰고, 월북(越北)으로 이어졌다. 잠시이더라도 '적십자청소년으로 활동'하며, 적(敵)까지 인정하지 않은 채로 '인류애를 배양-발휘해온 사실'과도, 관계된다. 

이제 제주도는 '과거시간(past time)에 있었던 발자취'에 대해서, 자료수집단계에 들어 와 있다. 한국동란을 기해서 적십자병원을 비롯하여,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이에 대한 '체계적인 점검(點檢)'과 더불어, 철저한 조사로서 보존과 병행하여 '후속세대에게 교훈'으로, 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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