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참전용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가 되자, 지역의 충혼묘지에 묻힐 수 있는지 알아보라 하셨다. 답은 명료했다. 전사자만 모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분명한 계급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현충원에는 장군들의 묘역이 있고, 모든 장성들이 사망하면 여기에 안장된다. 하나 밖에 없는 젊음과 일생을 국방을 위해서 헌신한 공로를 생각하면, 당연한 배려라고 이해할 수는 있다. 사병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무한갑질이 만연하던 시대였고, 방산비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군부 안에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미년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제주인 조봉호의 희생은 높이 평가된다. 독립군자금을 모아서 보내는 일에 앞장섰고, 드러나자 스스로 책임을 감당하겠다고 나섰다. 대구에서 옥사하였으니, 그 뜻을 높이 현양하기 위해 사라봉에는 기념탑이 높이 세워졌다. 
 
이 일을 도왔던 젊은이 최정식은 더 길게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의 공로는 왜 보상되지 않는지 물어보았더니, 오래 살아남았고 면서기가 되어 일본에 협력한 일이 흠이 된다고 한다. 생계형 친일로 보기에는 반민족 행위자로서 죄가 중하다는 이야기다. 고향은 전주 근교였는데, 출옥 후에는 제주를 떠났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타계하여 장례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여러 번 그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한국전쟁에서 적을 격퇴한 공적으로 보면, 구국의 영웅으로 받들어 그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반대자들은, 일제 말기에 간도특설대의 간부로서 독립군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으니, 친일파로서 매국행위라고 지적한다. 국립현충원에 묻힐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변명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독립군이 되었다 한들, 독립이 더 빨리 왔겠느냐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판단을 유지하였다.  
 
히틀러가 프랑스 주요부분을 점령하자, 계속 싸우겠다는 사람들은 영국으로 건너가서 망명정부를 세웠다. 현실을 인정하고, 독일과 타협해서 프랑스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남부 프랑스만이라도 지키는 방법으로 차선책을 취하였다. 수도가 비시에 있었기 때문에 비시 정권이라고 보통 지칭한다. 
 
독일이 패퇴하면서 자유 프랑스가 실지를 회복하자, 이전에 비시 정권 시절에 독일과 협력했거나 어울렸던 사람들을 처단하였다. 어정쩡하게 판세를 전망하던 사람들은, 한때 독일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애썼다. 상황이 달라지자,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나느라, 오히려 부역자들을 규탄하는 대열에 지나치게 지지하고 앞장섰다. 광범위한 숙청이 일어났고, 오랜 동안 지속되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갑작스런 선택은 수많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시민운동의 복판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였고, 여성들의 권리를 부각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홀연히 떠나 책임을 피한 것인지, 작은 구설수도 견디지 못하고 가장 소중한 목숨을 희생하여 스스로를 단죄한 것인지,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고인은 4.3 진상규명 과정에서 늘 희생자들과 제주도민 편에 서서, 어려움을 뚫고 진상보고서를 출간하였다.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살았던 삶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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