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비가 오려는지 어제저녁부터 뼈마디가 천근만근이다. 벌써 뼈마디 운운하는 나이가 됐다는 게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런 몸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순응할 수밖에. 이럴 땐 오히려 "오몽거리는 게 낫다"던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마침 4·3문학순회가 있는 날이라 잘 됐다며 기쁜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걷는 사람' 출판사 대표인 김성규 시인과 김은경, 권기선 시인 등이 함께 걷겠다고 내려왔다. 제주의 작가들과 타 지역 젊은 작가들과 함께 걷는 4·3문학순례길, '4·3이 청춘에게'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행사다. 강덕환 시인의 안내로 제주항 근처 옛주정공장터, 북촌리 너븐숭이, 당팟 등지를 걸었다. 아직 다 낫지 않은 관절염 다리를 절뚝이며 바쁘게 쫓아다녔다. 비는 동쪽으로 갈수록 더욱 추적였고, 북촌리 당팟 가까이 다다를 즈음에야 잠시 숨을 골랐다.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곳에 어김없이 있는 것은 '퐁낭'이다. 마을의 퐁낭을 보면 지리·자연적 환경이나 역사를 알 수 있다. 바닷바람이 세면 나무는 산 쪽으로 이울고, 산허리가 잘리면 바다 쪽을 향해 자꾸만 앞머리를 숙인다. 제주의 퐁낭은 대체로 산 쪽으로 이우는 모습이다. 

어릴 땐 퐁낭 앞을 지나는 게 두려웠다. 어른들의 시선, 목소리 큰 아저씨,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괜히 주눅 들게 했다고나 할까. 죄 없는 나를 나무라는 것 같고, 술주정하는 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 식구가 통째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수치심을 느낀 것도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퐁낭' 이라는 나무에 대한 관심보다는 퐁낭을 중심으로 한 소도리 문화에 더욱 관심이 생긴 것 같다. 

북촌리 당팟 퐁낭은 겁먹은, 나이든 사슴을 닮았다. 총을 맞은 듯 한 쪽 뿔은 잘려지고, 눈은 푹 들어가고, 기운 빠진 두 다리를 일으켜 세우며 있는 힘껏, "불 캄쪄. 혼(아래아)저 나오라"며 소리 지르는 것 같다. 나무의 정령이 있다면 그날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 이런 형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번갈아 악쓰며 부르는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었지만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도무지 헤어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둘 다 고무신이 벗겨진 채 사람들에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울고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서로 이름 부르며 가족을 찾는 소리와 군인들의 악에 바친 욕소리로 운동장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머리 위에서 한 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편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붙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 빈자리에 한 여편네가 앞으로 엎어져 있고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아기만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영배 각시 총 맞았져!"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두살난 그 아기가 바로 방앳간 허는 장식이여, 후제 외할망이 키웠쥬. 이젠 결혼도 하고 씨 멸족할 뻔한 집이서 아들 둘까지 낳아시니 죽은 어멍 복을 입은 것일 거라, 아매도." 작은당숙의 말이었다.  죽은 사람을 보자 나는 더럭겁이 났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 앞이 트였지만 길수형과 나는 장교가 권총을 빼들고 서 있는 조회대 뒤로 달려갈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다간 저 사람이 틀림없이 총을 쏠 테지.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사람들이 서편 울타리에 붙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군인들은 긴 장대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건 교무실 앞 추녀 끝에 매달아두었던 것으로 학교 운동회 때마다 비둘기들을 넣은 대바구니 두 개를 맞붙여 얇은 종이를 발라 만든 큰 공을 높이 매달아놓은 데 사용되던 거였다. 그것은 얼마나 신나는 경기였던가.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 중에서)

1949년 1월 17일 북촌초등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을주민 10명은 피살된 군인을 들것에 실어 함덕군주둔소로 갔다. 이들 중 경찰가족 1명만 빼고, 9명이 피살됐다. 북촌리 마을 주민 모두에게 '빨갱이'이라는 죄목을 씌우며 그 첫 희생자가 된 이들이었다. 

그 사건 이후 북촌리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한 대학살이 이어졌다.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너븐숭이'와 동쪽 '당팟' 등 2곳으로 나눠 이뤄졌다. 총 460여명이 죽임을 당했다. 한 마을이 학살로 인한 희생자 수가 이렇게 많은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드물다. 

당팟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콩잎이 어랑어랑 돋아나고 있었다. 틈새 땅에 알뜰하게 농사를 지은 것이다. 누군가 "멜젖 싸 먹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순간, 땅 속의 현기증이 일었다. 김훈의 '찰의 노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가 떠오른 것 같기도 하다. 4·3 때 희생된 자들의 피와 뼈가 저렇게 푸른 콩잎을 돋게 하고, 그 뿌리에서 탄알들이 자꾸만 발견되고 있다는 걸 들으니 몸에서 뼈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고 지고 있었으니, 그걸 잊고 살았으니 내가 섬뜩한 것이다. 

어느 날 만난 한 할머니의 증언이 아직도 또렷하다. "눈알은 가매기가 빠먹어불고, 다리 한착은 개가 물어가불곡, 옆갈리엔 솔친 베렝이가 바글바글… 에구 델루와. 경 추접한 시상이라서."(눈알은 까마귀가 물어가고, 다리 한 쪽은 개가 물어가고, 옆구리엔 벌레가 바글바글...정말 더러운 세상이었어). 할머니는 자신이 10살 때 경험한 4·3 사건에 대해 그렇게 증언하며 먼 산만 자꾸 바라보았다.

그 때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그들의 물아기 딸, 큰언니, 큰형부, 큰 조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의 냄새, 버려진 고무신, 피 묻은 개의 입, 눈감으며 덮어주던 가마니…, 이런 것들이 아직도 가끔씩 생각난다며 깊은 숨을 고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음을 직감하며 거기 가면 뭐라 말해야할지 몰라 서성거린다.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좋은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야 하나. 아니면, "이쪽도 저쪽도 아니우다"며 그 때의 말로 화답해주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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