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꽃이 피었다. 연분홍의 꽃잎술을 오므리기 시작하면 깨알이 영글어갈 것이다. 태풍 소식이 들려와서 걱정이다. 어빙호의 악몽이 되살아나길 원치 않기에 아침에 눈을 드면 날씨예보를 검색하게 된다. 누가 보면 완전한 농부의 일상이다. 농사라 할 수도 없는 텃밭 수준의 깨를 갈아놓고 그나저나 호들갑이다. 비가 오고 나니 깨며 풀이며 분간이 안될 정도 자랐다. 깨 반 풀 반인 밭을 보니 심란하기 그지없다. 

옆 밭 할머니의 호통이 두려워 호미를 들고 김을 매는 척하다가 아예 예초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칼날이 드르르샤샤거리며 풀들을 베어낸다. 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다 함께 살 수 없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고 타협의 속내를 건넨다. 뭉텅뭉텅 풀들이 누우며 "이 대로 내가 죽을 것 같냐"며 시퍼런 몸둥이를 파르르 떤다. 비가 내리면 또다시 풀들이 무성하게 일어날 것이다. 

밭담 구석에 노루가 죽어 있었다. 옆 밭에 제초제한 풀을 뜯어 먹고 이 밭에 와 쓰러진 게 분명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며 속으로 슬픈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역한 냄새가 훅하고 올라온다. 키 작은 새끼 노루다. 눈 주위에 파리들이 들끓고, 벌레들이 내장을 파먹고 있다. 노루의 눈을 더는 볼 수 없어 신문지로 둘둘 싸서 앞동산에 묻어주었다. 파리떼들이 냄새를 따라 앞동산으로 이동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냄새를 따라 움직이는구나'라고 혼잣말을 한다. 

언젠가 김을 매러 깨밭에 들었을 때, 노루 한 마리가 밭담을 넘어왔다. 밭 중앙으로 달려오던 노루가 나를 보자 화들짝 놀라 냅다 달음질해 옆 밭으로 도망간 적이 있다. 작년에 콩밭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게 저 녀석일 거라 여기며 호미로 밭담을 치며 "훠이 훠" 호통을 쳤는데, 죽은 저 노루가 그 새끼일까 싶어 안쓰러워진다. 어느 한 놈이 죽든 말든 노루들은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이 밭 저 밭을 돌며 생을 이어갈 것이다. 

그는 다만 오십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았고 
유월의 햇살과 고추밭과 물감자꽃을 사랑했고 
토담과 수양버들 그늘과 아주까리 잎새를 미끄러지는 
작은 바람을 좋아했다 
유동꽃 이우는 저녁에는 서쪽 산기슭에 우는 
비둘기 울음을 좋아했고 
타는 들녘끝 가뭄 속에서는 소나기를 날로 맞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쇠똥과 아침 이슬과 돌자갈을 은화처럼 매만졌고 
쟁기와 가래와 쇠스랑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더러는 제삿날 제상에 어리는 불빛을 좋아했고 
농주 한 잔에도 생애의 시름을 잊곤 했다 
수많은 영웅과 재사와 명언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이 농부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쓰던 낫과 그가 키우던 키 큰 밤나무와 
밤꽃이 필 때 그가 완강한 삶의 일손을 놓고 
소슬한 뒤란으로 돌아간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기철 시, 「한 농부의 추억」 부분)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죽음을 생각한다. 이름을 남길 필요는 없지만 가끔은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사라는 의식을 치르지만 제사에서 그 이름이, 치적이, 훈장 없는 훈장의 내력이 공론화되는 일은 드물다. 살아남은 이들의 삶이 음복에 곁들일 뿐이다. 참 씁쓸한 날이 누군가의 제삿날이다. '그가 쓰던 낫과 그가 키우던 키 큰 밤나무'만이 그의 죽음을 기억할 뿐이다. 그마저도 폐기처분 된다면 누가 그를 기억해줄 것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은 갑작스럽게 생을 떠난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 역)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는 '유미코'(에스미 마키코 역)의 이야기이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유미코에게 죽음은 지울 수 없는 그림자이다. 치매로 행방불명된 할머니, 이쿠오의 자살은 불현듯 떠올라 일상을 얼어붙게 한다. 아이들과 수박을 나눠 먹는 소소한 행복마저도 걸레를 내던지듯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버리는 것이다. 할머니의 행방불명과 남편의 자살, 유미코에게는 이유를 캐물을수록 더 미궁으로 빠지는 죽음들이다. 가슴 한 곁에 묻어두었던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재혼한 남편 타미오(나이토 타카시 역)가 말한다. "아버지가 전에는 배를 탔었는데,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 멀리 아름다운 빛이 보였대. 반짝반짝 빛나면서 아버지를 끌어당겼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라고. 

삶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간혹 죽음이 동원된다. 누구든 죽기 마련이며, 죽음을 앞둔 나를 생각하면 삶이 보인다고.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설득하기에 좋은 말이다. 또 이런 말도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망각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기억하기로서의 죽음. 죽음을 기억해야만 오늘, 여기,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은 사라지되 그림자는 남아 있는 법,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경계에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일말의 죄의식은 떨어지는 꽃잎에도 고개를 숙이게 할 것이다. 동거동락의 경험이 없는 야생동물의 죽음에도 안식의 기도를 드리는데, 하물며 가족의 죽음은 어떻겠는가. 언젠가 들었던, 노루의 울부짖음이 어떤 의미의 울음이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선택할 수 없는 죽음의 이유가 도처에 깔려 있는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더욱 안전하게 생을 건너 갈 수 있는 것인지 노루도, 꽃들도, 사람도 안절부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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