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여기 빛나는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일어나 / 테라스의 난간 위로 불어대면, / 여기는 소렌토만이 가장 잘 보이는 곳, / 한 남자가 한 아가씨를 포옹하고 /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네. / 그러면 그는 목소리를 맑게 하여 노래를 다시 시작하네.…" 

얼마 전 이탈리아 팝가수 루치오 달라가 만들고,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불러 우리에게 익숙한 '카루소(Caruso)'란 노래는, 한 성악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오롯이 담고 있다. 카루소가 임종 직전에 머물렀던 소렌토 해안의 한 호텔 테라스를 배경 삼아, 생전에 미국에서 누렸던 모든 성공 따위는 마치 배가 지나간 다음 생겨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물거품과도 같음을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는 나폴리 태생의 빈민가 출신으로서 정규 음악학교의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오페라 무대의 상징인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최고 오페라 가수로 우뚝 서는 위업을 달성한다. 게다가 때마침 붐이 일기 시작한 축음기의 보급과 음반산업의 추세에 맞춰, 영국의 그라모폰사나 미국의 빅터사를 통해 취입한 그의 음반들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카루소의 위대성은, <워싱턴 포스트>(1995년 12월 31일자)가 선정한 지난 천년 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가장 뛰어난 성악가로 '엔리코 카루소'를 뽑고 있는 기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카루소는 테너도 아니요, 바리톤도 아니요, 베이스도 아니다. 그는 세 가지를 모두 결합시킨 성악적 특성을 지닌 가수다." 이렇게 극찬한 이는 한때 그의 주치의이기도 하면서 가장 가까이서 그의 목소리를 관찰해 《카루소 발성법》이란 책을 펴낸 마라피오티 박사이다.  

그런데 인생 최고 전성기인 40대 후반, 급작스레 찾아든 늑막염이란 고질병은 카루소를 위기로 몰아세웠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공연하던 도중에 각혈을 쏟아냈고, 메트로폴리탄에서 오페라 <유대여인>을 끝으로 그의 화려한 무대 활동의 이력은 멈추고 말았다. 

투병 중 그가 선택한 마지막 희망은 고향 나폴리로의 귀향이었다. 지중해성 태양과 바닷물이 자신의 병든 몸을 낫게 할 것이란 소박한 믿음에서다. 전지요양 차 나폴리로 돌아온 카루소는 소렌토 해안의 한 호텔에 머물며 수영과 일광욕을 즐겼는데, 그로부터 두 달도 채 못된 1921년 8월 2일에 영면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지난 8월 2일은, 이 위대한 카루소가 향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코로나 사태의 영향 때문인지 이와 관련된 학술행사나 추념 공연 소식은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혼자서나마 그의 삶을 추상해볼 심사로 해묵은 영상물 자료 중 영화 '위대한 카루소(The Great Caruso)'를 찾아 꺼내 들었다. 

무릇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특정 분야의 정상에 도달하기까지는 천부적 재능과 함께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함은 물론이다. 더불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을 보다 유리한 여건으로 바꿔나갈 줄 아는 지혜의 발휘도 무엇보다 소중함을, 이 '위대한 카루소'는 웅변적으로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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