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에서 보낸 작가의 성장기와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산문집 「바다와 술잔」을 펴낸 소설가 현기영씨.  
 
소설가 현기영씨(61)의 산문집 「바다와 술잔」에는 제주에서 보낸 작가의 성장기가 오롯이 담겨져 있다.

폐결핵으로 죽어간 첫사랑 소녀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담고 있는 표제작을 비롯, 4·3의 후유증으로 자살한 고등학교 선배들과 자신도 두 번이나 겨울바다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이야기는 혼란의 역사를 살아야 했던 당대의 생생한 기록이다.

제주에 올 때마다 즐겨 찾는 용두암과 바다와 바람 등 제주에 얽힌 서정적 이야기는 제주에 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남의 일이 아닌 바로 우리의 삶으로 읽힌다.

또 박정희 기념관, 영어공용화론, 지역감정, 9.11 테러와 미국의 보복전쟁 등 현실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눈에 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의 호전적 태도에 대해 한국 작가로서 할 말은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이번 수필집은 서정성보다는 사회비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술에 얽힌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실종’ 등 엽편소설 5편과 신경림, 김성동 등 예술인들과 교류, 4·3의 비극을 작품화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 시절 합수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이야기들은 사회 비판적 메시지와 어우러져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번 산문집은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3년전 발표했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이후 작가로서 일종의 ‘숨고르기’를 위해 펴낸 책이다.

“이성적·논리적 전략을 세워야 하는 소설 쓰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한 소설 작품을 끝낸 뒤 남은 자투리들을 마음 편하게 에세이로 엮는 일이 꽤나 재미가 있다. 그것은 이성이 아닌 감성이고, 긴장이완의 고른 숨결”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다음 작품을 위한 ‘숨고르기’로 써낸 산문이지만 그 속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는 작가적 양심의 편린들이 박혀 있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4·3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현기영. 그는 이제 제주 4·3 등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소설로 형상해 온 것과는 달리 서울 살이를 하며 당대에서 겪은 일들을 소설로 쓰겠다고 밝히고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의 내년 봄호부터 새 소설을 연재할 계획이라는 작가는 소설 연재를 마치면 제주로 귀향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거처를 고향인 제주로 옮기겠다고 밝힌 만큼 작가를 좋아하는 선·후배 문인들과 용두암 해안에서 기분 좋게 취한 작가의 모습을 조만간 볼 수 있을 듯 하다. 화남.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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