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新)물질로드 3.'길'을 내다

'어깨 너머'의 사회학, 전승.활용 동력으로 

연대 바탕 공동체 문화로 코로나 다음 기약
유사한 생업과 차별화…삶 기술적 접근 필요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영역 확장 살려야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해녀들. 자료사진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해녀들. 자료사진

 

"나영 물벗 허영 바당 가자"
해녀 문화는 '섬'에서 나고 '물'에서 배운다. 섬이라는 의미는 함축적이다. 물 역시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제주해녀의 삶을 추적하면서 이들이 가진 가장 큰 힘을 '공동체'에서 찾았다. 바다를 접한 지역들에서 유사한 형태의 생업을 이어가는 경우를 찾을 수 있지만 끈끈한 유대로 이어진 공동체의 기준을 적용하면 제주 해녀만 남는다. 해녀를 양성하는 작업의 첫 코부터 제대로 잡아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대에서 대를 잇는
해녀의 길은 눈으로 다 보기 어렵다. 살아가면서 만들어진 길이 더 많은 까닭이다.
지난해 가파도에서 만난 김춘희 할머니(78)는 섬에서 섬으로 옮기며 물질을 했다. 마라도 출신인 김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아기업개로 가파도 생활을 시작했다. 해녀였던 어머니에게는 김 할머니를 포함해 건사해야 할 자식이 4명이나 됐다. 정작 김 할머니는 가파도에서 물질을 배웠다. 17살에 물질을 시작해 60년 넘게 가파도 바다를 누볐다. 고 김영갑 선생의 사진집 '마라도'(2010.8.30.)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 김 할머니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고무옷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은 김 할머니의 오랜 기억 속에만 있었다. 사진집 속 어머니가 반가우면서도 낯설었을 수도 있었다. 정작 작업하는 바다가 달랐고, 평생 물벗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래도 바다에서 삶을 일궜던 DNA는 자신 역시 그 어머니의 모습으로 남고 싶다는 바람을 남겼다. "더 나이가 들기 전 동편 바당 앞에서 나도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는 그 바람은 가파도 막내 해녀이자 어촌계장으로 다음을 책임지고 있는 유용예 해녀가 들어줬을 거라 믿는다.
우리가 보는 해녀는 바다에서 고된 작업을 하며 가족을 지키는 '어머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기억을 밟고 서 있다는 것을 간혹 잊곤 한다. 바다 해(海)가 어머니 모(母)를 품고 있는 이유를 해녀는 온몸으로 이야기한다. 초경계의 4차 산업혁명과 초일상을 불러온 코로나19 팬데믹은 '어깨 너머'의 사회학을 허물어 다시 쌓고 있다.

가파도 해녀들이 테왁줄을 엮는 방법등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제민일보
가파도 해녀들이 테왁줄을 엮는 방법등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제민일보

 

△살기 위해 만드는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 일들이다.
바깥물질을 나간 해녀들을 그동안 익숙했던 생애사적 관점이 아니라 생활사적 측면에서 보면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재일제주 1세대 해녀인 고 홍석랑 할머니는 20살이던 1944년 국민징용령에 의해 일본에 건너갔다. 광복 직전 일제 강점기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더라고 당시 홍 할머니에게 선택권이 없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른바 징용물질을 했던 홍할머니는 광복 후 귀향하지 못하고 물질할 수 있는 바다를 찾아 움직였다. 홍 할머니에게 제주와 바다는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몸과 마음이 자유로웠던 곳'. 그래서 고령으로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도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홍 할머니와 더불어 일본 동쪽 작은 어촌 마을인 미나미보소까지 물질을 하러 갔던 해녀도 여럿 있었다. 90이 넘은 일본 노(老)아마는 이들이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할 수 있겠다 싶어 따라했다는 말을 했다. 그 전까지 아마들이 작업 영역은 해초를 채취하는 것이 전부였다. 바닷속에 들어가 전복, 소라 같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은 남성들의 영역이었다. 해녀 어머니를 둔 친구가 있었다고 말을 꺼낸 한 지역민은 '교육열'을 얘기했다. 늘 따뜻한 밥을 준비해놓고 '공부하라'는 말을 했던, 그래서 친구는 도시로 갔고 그렇지 않은 자신은 고향에 남아 일한다는 우스개를 던졌다.
같은 마을에 남아있는 제주 출신 해녀들은 현지에서 물질을 배웠다. 단 3명 뿐이지만 반드시 '둘 이상'작업을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서로 돕고 채취한 해산물을 손질하거나 현지식으로 만든 테왁에 '삼춘'들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 테왁줄을 맨다. 그들이 낸 길이다.

천연염색공예가 박지혜씨가 시어머니로부터 해녀복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천연염색공예가 박지혜씨가 시어머니로부터 해녀복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다음으로 이어가기 위하여
해녀는 계속해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바다 사정도 예전만 못하다. 누구 책임인지를 묻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다만 '해녀문화'측면에서 그들이 전하는 생활양식과 공동체 의식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라는 것만은 보다 분명해진다.
그 것에 다가갈 길이 계속해 만들어진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2019년과 2020년 진행한 가파도 프로젝트가 그 한 예다. 더 물질할 사람이 없어 가르쳐 주지 않았던 '테왁 줄 매는' 작업이 문화 콘텐츠 프로그램으로 재탄생했다. 작은 연철 조각을 연결한 벨트를 넣을 수 있게 만든 어깨말이(연철 조끼)를 다시 만들기 위해 한때 힘깨나 썼을 법한 오래된 재봉틀이 새 볕을 봤다.
어음대(테왁을 고정하는 둥근 테 모양의 도구. 예전에는 나무로 만들었다)에 망사리 매듭을 연결하는 작업을 놓고는 의견이 팽팽하다. 처음 밑코를 몇 개로 하느냐부터 모양을 잡는 것 까지 기억을 꺼낸다. 여기서 다시 '어깨 너머'가 등장한다. 물에 다녀오면 늘 몸이 안 좋았던 어머니 대신 해녀 삼촌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녔던 경험이 관지노에 아들노를 연결하는 법, 지혜가 됐다. 언젠가 이것이 또 다른 형태의 다음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에 한치의 의심도 없다.
서귀포문화도시 사업에 연관해 위미노지복식문화탐험대가 해녀복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며느리를 위해 해녀 출신으로 두차례인가 바깥물질 경험이 있는 시어머니가 움직였다. 이렇게 다시 길이 열린다.

특별취재팀=고미 방송미디어국장,김봉철 부장대우,이진서·김수환 기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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