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항일운동 90주년 <상>]

여성 중심 생존권 운동 의의
정당한 평가·예우 등 요원
독립유공자 추가 선정 필요

2019년 열린 제87주년 해녀항일운동 기념식에서 구좌해녀들이 당시 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제민일보 자료사진
2019년 열린 제87주년 해녀항일운동 기념식에서 구좌해녀들이 당시 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제민일보 자료사진

제주 바다를 자맥질과 숨비소리로 일궈온 제주 해녀들은 일제강점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우리나라 최대 어민운동이자 전국 최대 규모의 여성운동으로,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크지 않던 시대에 '여성 중심의 생존권 운동'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예우 등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올해 90주년을 맞은 제주해녀항일운동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 사회 약자, 역사의 강자로

1932년 1월 12일 세화오일장터가 여성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날은 세화리 장날이자 제주도사(현 제주도지사) 겸 제주도해녀어업조합장인 다구치가 부임 후 구좌면을 방문한 날이다. 수백명의 해녀들은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일제의 착취 등에 맞서 시위를 펼쳤다.

1931년 6월부터 1932년 1월까지 구좌읍·성산읍·우도면 일대에서 이어졌던 '제주 해녀항일운동'은 연인원 1만7000여명이 참여하고 238회에 걸친 집회·시위를 전개한 대규모 운동이다.

해녀항쟁 당시 언론보도
해녀항쟁 당시 언론보도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 해녀들은 채취한 해산물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권익 보호를 위해 창립한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일본 관제조합으로 변질되면서 반발이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합이 경매가격을 낮춰 책정하자 해녀들은 직접 투쟁을 모색했고 야학 공부를 통해 민족의식을 함양, 항일운동의 필요성을 다졌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시위 이후 1월 12일 대규모 시위를 전개, 제주지사에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는 34명의 해녀 주동자와 수십명의 청년운동가를 체포했고 이를 저지하는 시위가 일어났지만 1월 27일을 끝으로 진압됐다.

△ 여성 국가유공자 '3명뿐'

이처럼 일제 수탈에 저항한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이자 여성 주도 최초 항일운동이라는 의의가 있지만 국가유공자 등록 등 조명사업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보훈청 등에 따르면 관련 국가유공자는 모두 11명(혁우동맹 8명·여성 3명)이다. 이 가운데 여성(해녀) 국가유공자는 운동을 주도한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 3명이다. 이들과 함께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김계석·고차동(고순효) 해녀의 서훈은 현재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녀항쟁 관련 판결문.
해녀항쟁 관련 판결문.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정당한 평가·예우를 강조하면서 재조명사업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여전히 답보상태에 있다. 제주도와 항일운동기념사업회 등이 정부에 추서를 올렸지만 투옥 기록 등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국가 보훈처에서 진행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제주 출신, 국가 포장자로서 최초로 부춘화·김옥련·부덕량 해녀가 선정되는 등 국가 차원에서 운동을 조명하면서 90주년을 분기점으로 사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자료 소실 등으로 자격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지속해서 서훈 작업 등을 펼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