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상봉행사에 남쪽의 어머니 장수천씨와 북쪽의 딸 량영애씨가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연합>
20일 반세기만에 금강산 온정각에서 북측의 혈육을 만난 제주출신 이산가족 상봉단은 부모, 형제를 만나 50여년간 속으로 삼켜온 눈물을 쏟아 냈다. 지나온 세월에 주름진 얼굴이지만 첫 눈에 혈육임을 알아보며 ‘살아만 있으면 언제가 만날 것’이라는 믿음은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함을 재확인케 했다.

◆‘살기 위해’북으로 갔다
반백년이 넘어 상봉한 3남매는 서로를 확인하자 눈을 감고 말았다.

20일 단체상봉장에 나타난 북한의 김상화씨(72)는 1948년 4·3당시 토벌군을 돕다가 오히려 무장대로 오인되는 바람에 가족들과 50여년 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다.

조천읍 신촌리 출신의 상화씨는 현장에서 총살 위기는 넘겼으나 결국 공비로 낙인 찍혀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북쪽을 택했다.

김씨는 두 동생인 청자씨(62·경남 남해군 거주)와 동화씨(56·경남 남해군 거주), 그리고 바로 아래 동생의 아내 송경자씨와 조카 김순석씨(42·조천읍 신촌리 거주)를 만나 애써 의연하게 보이려 했으나 흐르는 눈물만은 감출 수 없었다.

동화씨는 “4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은 평소 ‘형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사망신고도 하지 않으셨고 ‘맏이를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되뇌셨다”고 눈물을 훔쳤다.

그는 또 “당시 너무 어려서 형 얼굴이 기억 속에 없었지만 첫눈에 혈육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면서 “이념이 뭔지도 모른다. 형님은 단지 살 수 있는 길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3남 2녀중 맏형인 상화씨는 18세 되던 해 4·3이 일어나자 동네 청년들과 함께 국군 토벌대 지원병으로 차출, 소속 중대에 지리를 안내하며 한라산을 헤집고 다녔다.

수색과정에서 중대장이 무장대에 사살 당하고 소대장마저 고향으로 발령 나면서 오갈 데가 없어지자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거니’하고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당시 무장대의 하산을 막기 위해 토벌대는 제주도민에게 통행증을 발급한 상태였고, 통행증 없이 군복차림이었던 상화씨는 경찰 검문에서 무장대로 오인 받아 일정기간 감금상태에 있다가 함께 갇혔던 일행과 함께 총살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등에 총상을 입고 ‘죽은 척’하고 있다가 시체 더미를 헤치고 야음을 이용, 집으로 돌아왔던 상화씨는 상처가 아물 무렵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의 신고로 수감됐으며 이후 제주교도소에서 인천교도소로 이감됐다.

청자씨는 18세 청년의 든든했던 오빠를 떠올리며 단체상봉이 진행된 두시간 내내 칠순의 오빠 손을 놓지 못했다.

◆량영애씨 반세기만에 어머니 재회
“내가 널 만나려고 이렇게 오래 살았나 보다”

53년만에 북측의 딸 량영애씨(71)를 만난 남측 최고령자인 장수천 할머니(97·경기도 수원시)는 북받치는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제주시 삼양동 출신의 장 할머니는 주름이 가득한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헤어질 당시 고왔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듯 했다.

장 할머니는 “이렇게 살아 있어 줘 정말 고맙다”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다 끝내 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영애씨는 서울 이화여고에 다니던 중 전쟁을 맞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영애씨는 기숙사가 폐쇄되자 친구들과 서대문구 적십자병원에서 임시직간호사로 일하다가 1·4 후퇴 때 북으로 갔다.

남측 가족들은 지난 62년 총련계 동포들을 따라 평양을 다녀온 친구들로부터 영애씨가 동향(제주도) 출신 의사와 결혼해 평양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100살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한동안 밥도 못 먹었다”면서 “주변에서 ‘건강해야 가서 딸을 만난다’고 권유해 숟가락을 억지로 들었다”면서 딸의 몸을 쓰다듬었다.<금강산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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