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면 세간에는 으레 무성한 뒷 이야기들이 나돈다. 게 중에는 근거 없는 비방과 인신 공격도 있지만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올 총선 결과를 놓고 보건대 뭐니뭐니 해도 역시 최대의 화젯거리는 유례없는 영남 지역주의의 돌풍으로 집권당을 제치고 제1당을 차지한 한나라당의 약진과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으로 구 정치인의 대폭적인 물갈이, 그리고 이에 편승한 386세대를 포함한 신진 정치 세력의 등장을 들 수 있겠다. 국민들의 큰 기대와 지지 속에 전개된 총선연대의 유권자 운동도 철벽같이 굳어진 지역주의의 망령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라는 창원과 울산 지역에서도 두 노동 운동가가 끝까지 상대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지만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영남, 그 가운데서도 부산·경남 지역에선 총선연대의 낙선자 명단이 곧 당선자 명단이란 소문이 줄곧 나돌았다.

영남 지역주의 바람몰이의 최대 피해자와 수혜자는 노무현과 정형근 의원이다.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구에 출마했다 낙선한 노무현 의원의 홈페이지에는 그의 낙선을 아쉬워하고 재기를 바라는 네티즌들의 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선거 후 일주일만에 2천명을 넘는 네티즌들이 지역주의의 희생양이 된 전도양양한 한 정치인의 의미 있는 정치 실험이 무산된 데 대해 안타까움과 분노를 토로하면서, 여기서 주저앉지 말고 부디 큰 정치를 구현하는 든든한 재목으로 우뚝 서 줄 것을 당부하고 있음을 본다.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에게나 있을 법한 펜클럽도 조직되어 이미 2백 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정형근과 노무현은 둘 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고시를 거쳐 판검사 경력을 가진 법조인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두 사람이 걸었던 역정은 사뭇 달랐다. 한 사람은 검사 재직 중 5공 때 안기부에 들어가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다 96년 총선 때 부산 북구에서 당선한, 엘리트주의와 보수극우사상으로 똘똘 뭉친 '디제이 특등 저격수'이며, 다른 한 사람은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다 88년 전 대통령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90년 3당 합당 때 김영삼과 결별하고, 야당에 남아 고군분투하다 부산시장 선거와 두 차례의 국회의원 선거 등 이번까지 내리 네 번이나 낙선을 경험한 불운한, 그러나 5공 청문회 스타로, 지조와 소신의 정치인으로 뭇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각인된 인물이다. 또 정형근은 안기부 재직 10년 동안 숱한 시국 사건을 총지휘하면서 때론 자신이 직접 나서 고문을 자행한 '고문과 공작, 폭로의 대가'로서, 구 소련과 동구권이 해체된 지금에도 시대착오적인 냉전 사상에 깊이 젖어 건전한 사회 비판 세력과 좌익 세력을 혼동하고 있는 골수 극우파 인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은 76.6%라는 압도적인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 무난히 당선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여론 조사에서 나타난 예상을 뒤엎고 1만 3천 여 표라는 엄청난 표 차로 낙선했다. 도대체 이 심각한 가치의 전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영남 지역이 가진 패권향수와 '전통 야도'라는 부산 지역의 오랜 지역적 저항주의, 그리고 여기에 '왠지 싫다'는 맹목적 반디제이 정서가 뒤엉킨 '집단적 최면'으로밖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물론 현 정권의 편중인사 시비에다 한일 어업협정 혼선, 삼성자동차 사태, 파이낸스 연쇄도산 등 일련의 일들이 야기한 상대적인 부산 경제의 침체가 지역 감정의 불에 기름을 부은 것도 사실이다.

누구는 말할 것이다. 호남은 놔두고 왜 영남만 매도하느냐고. 그러나 이 것은 결코 이유 있는 항변이 될 수 없다.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이번처럼 단 한 곳을 제외한 전 지역을 영남에서 '싹쓸이'한 전례도 없을뿐더러, 호남은 박정희 정권 이래 30년 이상 지역적 차별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고, 또 80년 5월 영남 지역에 기반을 둔 광기의 신 군부 세력에 의해 수 천 명의 무고한 광주 시민들이 학살당한 처절한 역사의 상처를 생각한다면, '네가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반사 심리는 아무리 봐도 선의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더욱 견고해진 지역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한국 정치의 미래는 암담하다. 다같이 남북 분단에 앞서 동서간의 분단을 슬퍼해야 한다.<김현돈·제주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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