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내 관심분야에 대한 책들만 골라 읽게 되었다. 학창시절 밤을 새면서 읽었던 소설책들이 비문처럼 사라져갔다. 그렇지만 서점에 가면 꼭 소설책을 들춰보며 작가와 연결되어진 스토리를 파악하며 돌아서 버리곤 했다. 그런데 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띈 책이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학창시절 줄기차게 그 분 작품을 읽었던 기억과 아직도 여린 감수성을 가진 소설을 쓰고 있다는 데에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누군가의 삶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평범한 얘기가 내 눈빛을 잡아끌었다.

의사 심영빈의 가족들이 저마다 생각하는 관점이 실상 우리네 가족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그럴 것이다’라고 단정지어 생각해 버리는 나쁜 습관들이 몸 구석구석 배어 있지 않을까 하는 비정함이 들었다.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일탈을 꿈꾸며 때로 빗나간 생(生)을 살기도 하고 일탈과 자유의 실랑이 속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영빈의 여동생 영묘의 남편 송경호의 죽음을 둘러싼 송 회장 가족들이, 죽음에 대처한 행동들이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아직도 의학과 대체의학에 대한 갈등은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화려한 외출. 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삼켜 버린 것처럼 은밀한 것인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은 어쩌면 영빈을 오랜 시간 가두던 현금의 집 베란다에 길게 줄기를 내리던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한 능소화의 허무한 슬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현금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는 표현을 빌어 친숙함과 낯설음의 경계를 사회적 제도 안과 밖의 질서를 얘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영빈과 현금이 불륜이라는 틀을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현실의 제도 안으로 끌어내리는 역할도 일탈의 한 모습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가부장적 이념을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일탈을 꿈꾸는 낯선 시간과 죽음과 생의 경계에 다다르게 하는 책이 아닐까 한다. 죽음과 생의 경계에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농담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낯선 시간 사이를 오가면서도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일탈을 꿈꾸면서 말이다.<김효선·다층문학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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