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중앙위원회가 오늘(29일) 심의·확정하게 될 제주 4·3 진상보고서(이하 보고서)의 핵심은 제주도민의 인권유린 상황 등 진상을 규명해 제주도민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인권보고서’라는 점이다. 또한 공권력에 의한 도민들의 무고한 희생에 대한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인증이라는 점이다.

4·3특별법은 4·3을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번 진상조사 결과 4·3 피해가 확대된 결정적인 1차적인 원인은 군의 무자비한 강경진압작전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공개적인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 총살하는 만행이 자행된 6개월에 걸친 중산간마을 초토화 시기에 피해자의 80%가 희생됐다.

하루에 수백명씩 심리없이 처리된 군법회의도 소송기록이 없고, 아예 재판을 않거나 형무소에서 형량을 통보하는 등 정상적인 절차가 무시된 것으로 나타났다.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수는 1만4028명이나 각종 자료와 인구변동 통계 등을 감안할 때 실제 인명피해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당시 전체 도민의 10%에 이르는 엄청난 희생으로서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고희생자 가운데 가해자가 밝혀지지 않은 9%(1266명)를 제외할 경우 총 피해자의 86.1%(1만955명)가 군·경 등 토벌대에 의해, 13.9%(1764명)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희생자 중에는 10세 이하의 어린이(5.8%·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860명)이 11.9%를 차지했으며, 여성도 21.3%(2985명)나 있어 당시 군의 무차별적인 진압의 일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9연대장과 2연대장은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을 펼쳐 1948년 10월부터 1949년3월까지 6개월 동안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전체 희생자의 80% 이상이 이 기간에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다.

아울러 두 연대장은 공개적인 재판절차도 없이 즉결처분을 감행했으며 북촌에서는 한마을 주민 400여명을 집단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진상조사 결과, 1948년 12월과 1949년 6월 두 차례에 모두 253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4·3사건 군법회의’가 재판서·공판조서 등 소송기록이 없으며, 재판이 아예 없었거나 형무소에서 형량이 통보되는 점, 하루에 수백명씩 심리 없이 처리하고 이틀만에 345명을 사형선고한 점 등으로 미뤄볼 때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후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제주도사태 등과 관련해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발언한 사실도 이번 4·3위원회의 조사결과 처음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집단희생의 최종적인 책임자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될수 있다.

또한 당시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보유하고 있는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사령관으로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으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9연대의 작전을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한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미국이 4·3 발발과 진압 과정에서 결코 자유로울수 없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4·3의 발발 배경과 관련, 1947년 3·1절 행사시 경찰의 발포사건과 이후 경찰·서청에 의한 테러 등으로 조성된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사건의 시발임이 밝혀졌다.

한편 일각에서 주장하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한 무장폭동설’은 사실과 다르며,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큰 잘못으로 지적되고 있다.

보고서는 끝으로 정부가 4·3을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위로와 명예회복 조치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