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이나 기다려온 제주도민들의 ‘4·3’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갈망이 마침내 이뤄졌다. 반세기를 넘겨서야 겨우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4·3의 진상. 총 577쪽의 방대한 분량의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채택되기까지는 숨가쁜 여정이 숨어있었다.

지난 21일 4·3중앙위원회의 6차 회의에서 진상보고서의 일부 내용을 놓고 위원들간 논란이 재연되자 소위원회를 통해 막판 의견조율을 시도한 게 3차례.

이 과정에서 30여건에 대해 수정 또는 내용 삽입·삭제 등이 이뤄졌다. 무엇 때문에 논란이 일었고, 어떻게 수정됐는지를 살펴본다.

위원들간 가장 첨예하게 대립됐던 부분은 ‘초토화작전’과 ‘집단살상’이란 용어사용의 문제. 이와 함께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 증언자들의 일부 증언을 근거로 이를 역사적 사실로 규정한 문제 등도 논란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정내용이 맨 먼저 눈에 띤 곳은 88쪽 ‘3·1절 시위사건’관련. 허가된 집회와 달리 시위는 불허됐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라는 주문을 받아들여 ‘기념행사가 끝난 후 군정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가받지 않은 가두시위가 시작됐다’고 손질됐다.

154쪽 무장봉기와 관련해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이란 부분을 삽입, 무장봉기의 주체를 분명히 했다.

일부 위원들은 또 진상보고서 곳곳에 등장하는 ‘초토화작전’이란 용어를 ‘대토벌작전’또는 ‘강경진압작전’으로, ‘집단살상’은 ‘집단 인명희생’으로 수정토록 했다.

239쪽 ‘초토화작전의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에게 있다고 판단된다’라는 내용은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판단된다’고 수정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 해제 사실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토벌대의 총살극을 조장했다’는 내용도 ‘…계엄령 해제 사실은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수정, 강경진압 책임자 문제가 다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다만 이번 진상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된 이승만 대통령이 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말한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라는 발언내용은 전문으로 싣도록 했다.

군법회의 절차(492쪽)와 관련해서는 ‘예심조사, 심리 및 판정·판결로 이어지는 군법회의의 기본절차를 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는 부분을 ‘예심과 심리를 했다는 증거가 없어 군법회의 재판절차가 정상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다시 정리했다.

이 밖에 575쪽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를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으로 수정, ‘미국’이란 직접적인 거론은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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