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올곧게 세우지 않는 것은 우리네 삶을 헛되게 살아가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만으로 밝혀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 제주4·3 역시 마찬가지다. 4·3발발 55주년을 맞은 올해 정부가 「4·3진상보고서」를 공식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오기에 각계의 노력이 있었지만 암울했던 시대에 ‘4·3’이란 화두를 던져 진상규명 운동의 물꼬를 튼 이들은 소위 재야로 불렸던 민주화운동 진영과 학생운동권이었다.

△4·3논의 싹 틔운 재야 운동진영
장기 군부독재를 청산하기 위해 온 국민이 떨쳐 일어섰던 87년 6월 항쟁은 사회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태동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제주지역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며 사회민주화와 함께 ‘4·3해결’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후보가 ‘4·3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거는 등 사회민주화 진전에 힘입어 4·3논의가 각계에서 분출되기 시작한다.

89년 제주4·3연구소의 발족은 4·3을 풀어나가는데 큰 밑돌을 놓는다. 초대 소장은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씨가 맡았다. 고창훈 제주대 교수와 김창후 역사학자, 강창일 배제대 교수가 뒤를 잇고 있다.

이 해에는 제주지역 운동단체들이 하나가 돼 ‘4·3추모제 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첫 추모제는 이지훈·정공철·오옥만·오만식·박경훈씨 등이 집행 책임을 맡아 도민들의 관심 속에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당시 제주노동상담소장이던 강남규씨는 재야운동진영에서 4·3논의를 이끌었고, ‘공준위’라는 한시적 기구를 탈피해 4·3 상설연대기구 설립을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각 단체들이 역량의 한계를 들며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자 흐지부지되고 만다.

임문철 신부와 고상호·양동윤씨 등도 당시 4·3논의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 특히 양동윤씨는 현재 4·3도민연대 공동대표로 4·3운동을 15년 넘게 일관되게 펼쳐오고 있다.

40년 넘게 변변한 위령행사 한번 치러보지 못했던 유족들은 합동위령제 개최를 갈망한다.

공준위와 유족회로 양분돼 치러지던 위령행사는 급기야 94년 합동위령제로 합쳐진다. 93년에도 공준위측 모갑경·고창훈·이용중·양동윤씨와 유족회측 김병언·박서동씨 등이 협상을 벌였으나 무산된 경험을 안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첫 합동위령제는 제단에 무장대 대장격인 ‘이덕구’의 위패가 올랐다는 이유로 유족회가 도 당국과 공준위를 맹렬히 비난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이 일에 대해 고창훈 제주대 교수는 의미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공준위는 한글로 위패를 제작했고, 유족회는 한자로 제작했다. 문제가 된 위패는 한자로 제작됐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셈이다.

공준위는 10년간 4·3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다 4·3 50주년이던 98년 ‘제50주년 제주4·3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를 거쳐 99년 4·3도민연대로 계승,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조직변천의 역사가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유족회와 합동위령제를 치르면서 ‘항쟁’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못해 정체성 논란에 빠지기도 했고, 4·3 상설연대기구 설립을 놓고는 역량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개별참여 방식으로 99년 3월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4·3도민연대)라는 상설조직체가 탄생, ‘4·3특별법 제정’투쟁으로 역량을 모아나간다.

4·3도민연대의 출범에는 양동윤씨와 93년 제5기 제총협을 이끌며 4·3특별법 청원운동을 전개한 오영훈씨의 역할이 컸다. 오씨는 현재 4·3유족회 청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96년 산업정보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강성민씨도 이 때부터 가세,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4·3유족회 사무차장을 맡는 등 4·3운동을 이끌 2세대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사회변혁의 선봉장 자임 학생운동권
암울했던 시기, 4·3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사회개혁의 선봉대임을 자임한 학생들이었다.

대학사회에서 4·3의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87년 제주대학교 대자보 사건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규모로 비합법 4·3추모행사를 치르던 수준을 뛰어넘어 각 대학에서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자보가 일제히 부착되는 ‘대형사고’가 터진 것.

이 일로 당시 제주대 총여학생회장 송영란씨가 구속됐지만 이후 ‘4·3진상규명’이 학생운동의 전면적인 구호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제주대 송형관 총학생회장과 김정열 서클연합회장 등은 비상학생총회를 소집하며 4·3에 대한 진상규명과 총여학생회장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을 대중적으로 벌여나갔다.

4·3발발 40주년을 맞은 88년의 대학사회는 3월28일∼4월8일 4·3추모기간을 설정해 위령제와 4·3진상규명 촉구대회를 치르는 등 4·3문제를 한 단계 더 공론화해 나간다.

89년에는 10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제주대에서 추모제를 가진 뒤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한다. 또한 과학생회가 출범하면서 학과나 동아리를 중심으로 4·3토론회와 세미나, 추모제가 열리는 등 더욱 대중화됐다.

89년엔 또 제총협(의장 홍명환)이 건설되면서 공준위와 연대투쟁도 더욱 강화된다.

제총협 3기(의장 위성곤) 들어서는 4·3을 전국대학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적극 건의, 전국에서 동시‘4·3시위’를 이끌어내 4·3을 전국적으로 이슈화시켰다.

93년 5기 제총협(의장 오영훈)은 국회내 4·3특위 건설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 같은 해 10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후 96년에는 대학 차원의 4·3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동백빌레」라는 자료집을 매해 발간하며 학생들에게 4·3의 진상을 꾸준히 알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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