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반백년이라는 질곡의 시간, 숨죽이며 흐느껴온 제주도민 한 맺힌 4·3을 세상에 알려내는 데 문화예술계의 활동은 실로 대담한 것이었다.

입에 담는 것조차 어려웠던 4·3을 정면으로 담아낸 현기영씨의 「순이 삼촌」에서부터 이어져온 4·3진상규명의 문화예술 운동은 희생과 노력이 뒤따르는 결과물이었으며 이는 4·3을 대중화시키고 제주도민을 하나로 응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현기영 「순이삼촌」, 4·3을 말하다.
1978년 서슬퍼런 유신시절 강요된 침묵 속에서 누구도 입 담지 못한 4·3의 참혹함이 4·3 발발 이후 30년만에 소설 「순이 삼춘」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창작과 비평」을 통해 금기의 벽을 허문 현기영씨(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순이 삼촌」은 무고한 수만명의 인명살상을 고발함으로써 4·3연구를 촉발시켰으며 문학·연극·미술 등 각 문화예술 분야에 4·3운동의 물꼬를 트는 기폭제의 역할을 담당했다.

현씨는 4·3을 소재로 한 작품들로 인해 1979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수사기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75년 ‘아버지’로 등단 이래 「도령마루의 까마귀」, 「소드방 놀이」등 초기작에서부터 1994년 작품집 「마지막 테우리」, 1999년「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에 이르기까지 4·3은 현씨의 소설세계를 지배하는 화두로서 지속적으로 다뤄졌다.

▲4·3문화운동 ‘분출’
4·3발발 40주년을 맞는 1988년, 4·3에 대한 논의가 침묵을 깨고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4·3에 대한 논문·연구서적이 출간됨과 함께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씨의 소설 「화산도」, 「까마귀의 죽음」이 번역 출판됐으며 86년 발표됐던 이산하씨의 4·3서사시 「한라산」이 뒤늦게 필화사건을 일으킴으로써 4·3은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씨는 절필을 선언키도 했다. 또 1988년 말에는 오성찬씨의 4·3증언채록집 「한라의 통곡소리」가 출판, 억울한 희생자로서의 도민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특히 89년은 4·3운동의 불을 더욱 댕기는 해로 기록된다. 현기영씨를 주축으로 한 4·3연구소의 발족 및 제주지역운동단체들의 4·3추모제 개최 등과 맞물려 문화예술계 또한 마당극, 노래극, 문학제, 강연회 등을 대대적으로 펼치며 4·3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된다.

특히 김수열 정공철 김경훈 한경임 김익현 장윤식 김석윤 고혜숙씨 등을 주축으로 87년 창단한 놀이패 한라산은 89년 4·3 해원굿 형식의 마당극 ‘4월굿 한라산’을 무대에 올렸고 이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는 등 곤혹을 치렀다. 이후에도 매해 사월굿 백조일손, 헛묘, 꽃놀림, 살짜기 옵서예, 사월, 상생굿, 사팔생오칠졸 등의 사월 굿을 지속적으로 펼쳐내고 있다.

이후 92년 4월에는 학살터인 다랑쉬굴이 발견돼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가운데 화가 강요배씨의 ‘4·3역사 그림전’이 열려 논의를 다시 활성화 시켰으며 강용준, 김명식, 고시홍, 김석희, 오경훈, 오성찬, 장일홍, 한림화, 현길언씨 등이 제주출신 작가들이 소설, 희곡, 시로 문화학 작업에 매진하는 등 4·3 논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87년 발족한 제주문화운동협의회 또한 민예총 탄생 전까지 우리노래연구회, 청년문학회, 놀이패 한라산, 보름코지 등을 모아내며 문화예술계의 구심축으로 4·3을 문화예술 운동으로 승화시키는데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4·3예술제와 민예총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제주민예총의 4·3문화예술제.

94년 문무병, 김상철, 강요배, 김수열, 박경훈씨 등을 주축으로 힘을 모은 제주민예총은 4·3예술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며 4·3문화예술운동에 또 다른 전기를 마련했다. 4·3진상규명과 도민명예회복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출발, 각 분야별로 치러지던 행사를 체계적인 결집, 문화예술계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98년에는 김영훈, 김평담, 문무병, 강창일, 임문철 신부 등을 주축으로 4·3 50주년 학술·문화사업추진위가 발족함에 따라 문화계, 학계, 종교계 등을 아우르는 범도민문화축전으로의 탈바꿈을 시도했다. 도내 처음 4·3유족을 불러모아 한라체육관에서 해원상생굿과 4·3의 진정한 해원을 바라는 방사탑 쌓기 등 도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풍성한 행사가 치러졌다. 이후 제주민예총의 4·3예술제는 2001년 제주4·3문화예술제로의 명칭 변경과 함께 4·3을 재연, 영령을 위로하는 거리굿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치러지던 분과별 행사를 한데 모아냄으로써 현재 4·3문화예술제로의 기틀을 잡았다.

이에 앞서 만화가 박재동씨는 96년 4·3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오돌또기’ 작품 설명회를 개최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등 4·3을 전국적으로 알려냈다. 그러나 현재 ‘오돌또기’는 재정적 문제로 작업이 중단된 상태.

무엇보다 97년 이후에는 영상이라는 대중 매개체를 통해 4·3을 이슈화 시켰다. 4·3영상다큐멘터리 「다랑쉬의 슬픈 노래」(1993)를 비롯해 「잠들지 않는 함성」, 「4·3함성」 등이 대학가를 돌며 4·3을 알려냈으며 부산 하늬영상(대표 조성봉)의 「레드헌트」 또한 화제로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제주민예총 차원에서 2000년 4·3영화제 개최 등을 통해 영상 채록의 중요성을 되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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