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4·3당시 희생된 주민 11명의 유골이 발견된 다랑쉬굴이 92년 4월1일 언론을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왜 4월3일이 아닌 4월1일에 공개됐을까”란 의문이 따라붙는다. 상식적으로 4월3일 공개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랑쉬굴을 발견한 건 4·3연구소다. 당시 소장이던 고창훈 제주대 교수는 “다랑쉬굴은 91년 12월31일 이미 발견됐다. 다만 공개 시기만 조율했을 뿐이다”고 회고한다.

발표를 앞당긴 이유에 대해 고 교수는 “안기부에 다랑쉬굴 정보가 들어갔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서둘러 언론에 공개하게 됐다”며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도내 언론뿐만 아니라 중앙 언론과도 발표 시기를 놓고 조율이 끝난 상태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연구소는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과 증언자, 부검의, 최병모 변호사, 이청규 당시 제주대 박물관장 등과 4월1일 현장을 방문, 4·3유골 발견 사실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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