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결과라고 했던가. 반세기를 훌쩍 넘겨서야 4·3의 진상이 정부차원에서 밝혀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됐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는 숱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암울했던 시대 민주화세력과 학생운동권이 희생을 감수하며 4·3논의의 물꼬를 텄다면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은 학계의 몫이었다. 그래서 ‘4·3진상규명’투쟁에 더욱 힘이 실렸는지 모른다.

▲제주4·3연구소
제주4·3연구소를 빼놓고 4·3을 거론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4·3진상 규명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투쟁을 벌인 실천가가 투쟁의 대오를 이끌었다면 4·3연구소는 투쟁의 이론적 기틀을 다졌다.

4·3연구소는 지난 89년 5월10일 공식 발족했다. 암울했던 시기, 창립식은 당연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초대 소장을 맡은 현기영씨와 역사학자 김창후씨 등 10여명이 모였다.

“반역의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의 깨어진 공동체를 한 조각 한 조각 소중하게 이어나갈 수 있도록 4·3영령들이 도와주소서” 4·3연구소 문을 열며 회원들은 이렇게 다짐했다.

4·3의 역사적 진실과 도민의 명예회복, 그리고 이를 통한 민주사회 건설과 민족통일을 앞당기겠다는 게 연구소의 활동 목표였다.

이후 연구소는 15년간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의 시작과 정점에 서 왔다. 4·3유족회의 통합과 4·3특별법 제정, 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도 이들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초대 소장이었던 현기영씨가 이사장, 강창일 배재대 교수가 소장을 맡고 있다. 고희범 한겨레신문 사장과 양조훈 전 제민일보 편집국장, 문무병 역사학자 등 40여명의 이사와 200명이 넘는 회원들은 연구소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연구소는 4·3피해 증언채록은 물론 유적지 발굴 등 4·3과 관련된 일이라면 모두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연구소는 이들 성과물을 모아 「4·3연구회보」와 「4·3장정」, 「4·3과 역사」 등의 정기간행물과 「이제사 말햄수다」, 「제주항쟁」 등의 단행본 20여권을 내놨다.

이밖에 4·3기행과 국제학술대회 등을 통해 4·3을 전 세계적으로 알려내고 있다.

특히 지난 92년 다랑쉬굴에서 희생자 유골 11구를 발굴한 것은 4·3의 실체를 밝힌 것으로 향후 4·3진상규명 운동의 획기적인 단초가 됐다. 94년 3월 애월읍 발이오름에서 4·3 피해 유골 1구를 추가로 발굴하기도 했다.

또한 4·3 당시 도내 일간지였던 제주신보(1947년 1월∼1948년 4월분)를 찾아 영인본으로 출간했고 47년에 작성된 남로당 문건도 발굴·공개했다.

지금까지 400회를 넘은 4·3역사기행도 4·3의 진실을 국내외에 알리는 산실이 되고 있다.

연구소는 또 지난 89년 도내 11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에서 간사 단체를 맡으며 각종 4·3추모 행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지식인들의 4·3논의 분출
4·3연구소의 창립과 함께 지식인들도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강단에서, 세미나 자리에서 4·3을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

88년에는 양한권씨가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명림씨도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다. 양한권씨는 서울에서 고교 교사로, 박명림씨는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4·3과의 연을 계속 잇고 있다.

4·3연구소 2대·4대 소장을 역임한 고창훈 제주대 교수는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다. 고 교수는 83년 소위 언더그룹 동아리 지도교수를 맡으며 4·3과 인연을 맺는다. “미국 학자 존 메릴이 쓴 「제주도 반란」을 읽고는 제주 사람도 아닌 외국인이 4·3을 기록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지식인의 자존심을 걸고 4·3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였다.

고 교수는 87년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 평민당 후보의 연설문을 쓴 저력이 있다. ‘4·3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걸게 한 장본인이었던 셈. 이는 4·3문제를 정치권으로 진입시킨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88년 7월22일 YMCA회관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는 4·3을 공식 거론, 제주에서 4·3논의를 주체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 교수는 또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씨와 「제주도 반란」을 쓴 존 메릴을 제주대 강단에 세워 이국인들의 입을 통해 4·3의 실체를 폭로하기도 했다.

지난 99년 국회에서 통과된 4·3특별법은 이미 고 교수가 10년 전인 89년부터 주장했던 터.

92년 4월 세상에 공개된 다랑쉬굴은 사실 고 교수와 당시 4·3연구소 사무국장이던 김동만씨가 91년 12월 발견한 것. 당시만 해도 안기부의 감시가 심해 함구로 일관하다 이듬해 4월3일에 맞춰 언론에 공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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