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오리엔탈호텔서 열린 제주4·3 55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김영학 기자>  
 
제주4·3사건 발발 55주년을 기념한 국제학술대회가 2일 오리엔탈호텔에서 열렸다. ㈔제주4·3연구소(소장 강창일)와 제주발전연구원(원장 고충석)이 공동 주최한 ‘학살·기억·평화, 4·3의 기억을 넘어’주제의 이날 국제학술대회는 국내·외 학자를 비롯해 도내 4·3관련 단체 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 높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달 29일 정부 차원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된 뒤 마련된 이날 학술대회에서 참가자들은 역사로서의 4·3뿐 아니라 인권회복을 위한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잃어버린 공동체를 꿈꾸며(현기영·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제주4·3과 한국전쟁 직후의 보도연맹사건은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무서운 금기의 영역으로 설정돼 왔다. 4·3이 철저히 부정되어 버림으로써 제주 섬 공동체도 무참히 파괴되어 버렸다.

물론 과거의 제주 공동체를 복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자치주의만은 본받아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잃어버린 옛 공동체를 꿈꾸며 탈중심의 변방정신을 도모할 때다.

정부수립 때 남한 백성들 대부분의 생각은 나라가 세워지려면 마땅히 통일된 나라여야지, 분단의 반쪽 나라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분단이 아닌 온전한 민족공동체 실현, 이게 바로 4·3항쟁의 이념이었다.

▲20세기의 집단학살과 교훈(크리스티안 슈미트 호이어·독일 DIE ZEIT 대기자)=1948년 12월9일 유엔총회는 ‘집단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 협약)를 채택했다. 이는 제주4·3이 발생한 해다. 협약은 범죄의 정의를 내리며 ‘의도를 가지고’(with intent)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1998년 한국은 국제형사재판소 정관을 채택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서명을 거부했다. 초강대국이 제노사이드 협약과 국제형사재판소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비극이다.

이런 가운데 집단학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두운 비밀들을 먼저 공개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냉전의 뿌리-히로시마에서 제주까지(마리아 휘버·독일 라이프치히대학 교수)=미국이 한반도를 분단할 즉흥적인 계획을 세운 뒤 자유로운 선택권을 빼앗아버렸다. 미국은 1945년 9월 극동 연합군사령부로 하여금 한반도 38선 이남의 영토와 국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한은 당분간 미국이 갖도록 했다.

이것이 사회적 반란의 동조자까지도 제거하기 위한 대량학살의 빌미를 제공한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미국은 야만적인 대량학살을 합법화하려 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또한 ‘트루먼 독트린’이란 봉쇄정책을 통해 공산주의가 없는 사회를 구축하는데 활용했다는 의혹도 있다.

▲제주4·3의 부흥과 화해(박명림·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제주4·3사건은 2개의 분단국가 형성시기에 발생한 잊을 수 없는 ‘혼란’이었다.

제주는 학살의 섬이었고, 냉전 초기 비극의 섬이었지만 최근에는 동아시아 평화와 화해, 인권의 상징적인 위치로 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화해와 서로 용서하는 제주인들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나서 제주인들의 영혼과 경로, 모델을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에 적용해야 한다. 제주도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평화·인권·화해의 미래정신을 바탕으로 ‘제주평화벨트’를 구축해야 한다.

▲집단적 기억의 재생과 복원(정근식·전남대 교수)=의례나 기념물 조성의 경우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게 매너리즘이다. 제주4·3평화공원 조성에서 나타났듯이 권위주의적 미학 또한 극복의 대상이다.

4·3의 경우 기념물 또는 기념공원 조성을 둘러싼 기억투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과거청산운동에서 생산했던 각종 문화적 산물들은 우리의 삶을 살찌우는 자산으로 취급돼야 한다. 증언과 기념물 조성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고귀한 개인적 삶과 역사를 드러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4·3역시 평화운동이란 연장선상에서 일종의 문화유산산업으로 정립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제주4·3의 기억들과 변화(권귀숙·제주4·3연구소 전임연구원)=도민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주4·3을 설명한다. 사건 2·3세대들이 기억하는 내용도 성별과 세대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이러한 담론은 진상보고 등 사실보다는 부모 세대로부터의 구술, 4·3사건 이후의 사회적 분위기, 재현된 이미지 등에 더 영향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험자들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억눌린 기억들을 더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억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전달돼 기억의 재생과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

이와 함께 4·3 진상조사와 문학·미술·다큐멘터리·연극 등의 예술운동과 더불어 기억의 사회사에 대한 연구도 더욱 심화돼야 한다.

▲21세기 히로시마의 역할-파괴에서 부흥과 화해로(가즈미 미즈모토·히로시마대 히로시마평화연구소 교수)=히로시마는 원자폭탄 투하에 따른 파괴를 거쳐 ‘평화’를 소재로 부흥을 이뤘다. 피해자들 역시 피폭 경험 때문에 평화에 눈을 떴다고도 볼 수 있다.

히로시마 부흥이 히로시마만의 노력이 아니라 외국의 원조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지원에 힘입었듯이 앞으로 히로시마는 파괴의 한 가운데서 복구를 위해 허덕이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주변국과의 진정한 ‘화해’가 필요한 것이다.

▲제주평화의 섬, 구상과 대안(고충석·제주발전연구원장)=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은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조성하기 위해 국제평화 및 협력관련 기구의 유치, 국제협력에 관한 연구소의 설립을 명시하고 있다.

또 국제평화 및 협력관련 국제회의의 유치, 남북교류 및 협력에 관한 사업, 그 밖의 국제협력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고 있다.

도민 대다수는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조성하려면 국내외로부터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중앙정부의 평화의 섬 지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자치단체의 절충노력 등 역할이 막중하다.

한편 이번 국제학술대회 참가자들은 3일 오전 열리는 제주4·3 위령제를 참관한 뒤 조천읍 북촌리, 선흘리 등 4·3 유적지 순례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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