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martial law)에 관한 문서를 동봉한다. 이 문서가 귀하의 모든 지휘관들에게 발표돼서 그들이 계엄령이 무엇인지, 언제 발표될 수 있는지, 누가 발표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영향이 무엇인지 숙지하도록 할 수 있다’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지 14일만인 12월1일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준장이 국방부 총참모장에게 지시한 내용이다.

4·3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이 최근 발견한 미국자료에서 밝혀진 이 내용은 계엄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자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한국군 수뇌부에 시행방법을 ‘훈수’하는 대목이다. 아쉽게도 그 시행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찾지 못했다.

이 계엄령하에 벌어진 중산간마을 ‘초토화’로 서너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로부터 80이 넘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재판절차도 없는 즉결처분 등을 통해 영문도 모른 채 떼죽음을 당했다.

‘미국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해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1949년 1월21일 이승만의 국무회의 발언은 반대세력을 제거해 정권을 안정시키고 미국의 군사·경제원조를 얻어야 하는 절박함과, 주한미군 철수를 앞두고 남한에 탄탄한 ‘공산주의 방벽’을 구축해야 했던 미국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보여준다.

4·3은 이승만에게 단순한 지역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었고, 1947년 3월12일 ‘트루만 독트린’을 통해 사회주의 봉쇄정책을 천명한 미국에게는 세계 냉전질서 구상에 큰 걸림돌이 됐다는 의미다.

미군정 때는 물론이고 1948년 8월24일 이승만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사이에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으로 한국군은 조직·훈련·무장·작전에 이르기까지 미군 고문관의 통제를 받았다.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사령관으로 진압작전을 지휘했고, 중산간마을 초토화를 ‘성공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했다.

4·3 시작부터 끝까지 미국이 있었고 제주도민은 없었다. 그런데 보은(報恩)이라니.<오석준·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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