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3월까지 4개월에 걸친 중산간마을 초토화는 4·3 전개과정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한 주민 집단살상을 불렀다. 4·3 진상조사보고서는 그 책임을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고문단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5< 계엄령과 중산간 초토화
48년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10월17일 해안선 5㎞이외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금지 포고, 10월19일 여순반란사건과 서북청년단 1000명 군·경 진압작전 투입, 11월17일 이승만 대통령 계엄령 선포 및 49년 1월21일 조속한 진압을 위한 가혹한 탄압 지시 등 일련의 흐름은 당시 국내외 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반민족처벌법 공포로 인한 친일파 정치기반 상실 우려에 처한 이승만으로선 반대세력 제거를 통한 정권안정, 유엔의 국가 승인과 미국의 군사·경제원조 확보가 절실했다.

냉전질서속에 주한미군 철수 필요성에 직면한 미국으로선 남한에 ‘공산주의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 숙제였다.

10월8일을 시작으로 고비때마다 미군 보고서를 통해 제기된 괴선박 혹은 소련잠수함 출현설은 강경진압의 빌미를 제공했고, 법에도 없는 계엄령 선포로 한국군 수뇌부가 우와좌왕할때 로버츠 고문단장은 국방부 총참모장에게 계엄령에 대한 문서를 보내 시행에 적극 개입했다.

제주도민 집단희생의 빌미가 된 계엄령은 계엄법 자체가 없는 시점에서 선포됐다.(계엄법 제정 공포 49년 11월24일)

제헌헌법과 미 군정보고서,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근거로 ‘4·3 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제민일보의 보도와 관련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불법 여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은 유보했지만 합리적인 자료와 근거에 의한 진실확인작업을 거친 보도임을 인정했다.

당초 초토화 작전개념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소개(疏開)시키고 해변마을에는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해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것이었지만, 토벌대의 ‘전과 올리기’로 변질돼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사라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집단총살이 이뤄졌다.

12월17일 미군보고서는 ‘제9연대 진압작전의 지속적인 성공은 수준 높은 작전을 전개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순사건 진압에 공적을 세운 대전 2연대와 맞교대를 앞둔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전에 여순에 맞설만한 업적을 세우기 위해 욕망을 표출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12월29일 9연대와 교체된 2연대는 ‘적의 최후의 한명까지 섬멸을 기하는 포위 고립화작전’을 실시했다.

여순사건이후 비정규군으로 진압에 참여했던 서청이 정규군으로 편입되는 한편 모슬포·성산포 경찰서가 신설되고 경찰특별부대 509명이 파견되는 과정속에 49년 1월1일 오등리 3대대 기습공격을 시작으로 무장대의 공세가 재개된다.

2연대의 진압작전은 무장대가 있는 산악지역에는 가지 못하고 해안마을 사람들에 대한 보복에 한정, 재판도 없이 주민들을 대규모 즉결처형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계엄령은 48년 12월31일 해제됐지만 1월12일 의귀리, 1월17일 북촌리, 2월4일 봉개지구(봉개·용강·회천) 등 주민 학살은 계속됐다.

49년 3월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해동안 1만4000∼1만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 됐다. 주민 30만명중 4분의 1이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4·3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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