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날처럼 아침 회진을 끝내고 어제 치우지 않고 퇴근한 탓에 너저분해진 외래진료실 책상을 정리하며 차 한잔을 마신다. 오늘 나의 진료실에는 어떤 고민과 어떤 사연이 내 도움을 청할까? 어느 의사나 다 그렇겠지만 매일 매일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비슷비슷한 처방과 처치를 하고 때론 따분해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웬만한 환자의 이야기에는 덤덤해지기 십상이다. 의사로서 내가 해줄 이야기를 다 하고 환자가 진료실을 나가고 나면 나는 어느새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잠시 후에 그 환자가 궁금증이 남아 다시 들어왔을 때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물어본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환자의 걱정과 조바심에 좀더 귀를 기울여야지’하는 다짐을 반복적으로 하곤 한다. 단 한번만 하고 변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중년의 아주머니가 약간 겁을 먹은 채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다. 손에는 다른 곳에서 검사한 초음파 사진이 들려 있다. 간에 별로 크지 않은 물혹이 하나 보였다. 병이 커지기 전에 빨리 발견하려는 마음으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종합검진을 받은, 어찌 보면 아주 모범적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물혹이라 할지라도 혹이 있다고 하니 걱정이 안될 리 없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혹이라는 단어는 바로 암이면 어쩌나 하는 공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의사 한사람이 암이 아니라고 해도 안심을 못한다. 나의 진료실을 찾은 아주머니도 걱정으로 3일간 잠을 설쳤다고 했다. 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모든 걱정과 염려를 해소시킬 수 있을까? 그래도 불안해하는 거야 아주머니가 의사말을 믿지 못하는 탓이니까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지 이렇게 생각해 보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같이 온 남편에게는 약간 짜증이 배어있다. 다른 병원에서도 거의 같은 질문과 대답이 있었나보다.

괜히 검사는 해 가지고 마음의 근심을 얻어 버린 꼴이다. “아주머니, 이거는요 나이 들어 얼굴에 주름이나 점이 생길 수도 있듯이 아예 병이 아니라고 잊어버리세요”하고 약간 멋을 부려 본다. 잘 된 걸까? 몸의 건강을 잘 관리하려다가 마음의 병을 얻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것말고도 병이라고 볼 수 없는 검사 이상소견은 많이 있다 .쓸데없는 걱정을 덜으려면 충분한 상담과 신뢰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바뀌면 얼굴주름이나 점, 간의 물혹도 다 병으로 취급받아 아주 간단히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이다.<이현동·의사·제민일보 의료자문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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