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병원을 찾는 것은 의사가 병을 낫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강도가 칼을 들면 흉기가 되지만, 의사가 들면 생명을 살리는 메스가 되는 것도 의사에 대한 신뢰가 전제가 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은 주민들이 나 대신 일을 잘하라고 뽑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행사하는 권한과 기능은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의 주인인 주민들이 빌려준 힘이 밑천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이 진정한 권위(權威)를 누리려면 힘의 과시가 아니라, 권한과 기능의 행사가 공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신뢰를 얻어야 한다. 높은 도덕성과 합리성, 미래에 대한 비전을 지녀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주민들이 빌려준 힘을 멋대로 휘둘러 주민 위에 군림하려 하거나, 밴댕이같은 식견으로 모든 일을 재단하려 하는데서 빚어진다.

노무현 정부의 화두인 지방분권 과제 가운데 주민투표제와 주민발안제, 특히 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임기전에 투표에 의해 해임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 도입 목소리가 높은 것은 힘을 빌려준 주민들의 신뢰가 깨졌다는 의미다.

굳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도의회의 ‘헌 칼’이 다시 도마에 오른 모양이다. 24일부터 3일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열리는 ‘4·3 항쟁과 동아시안 인권’ 국제학술세미나 지원 예산 3000만원을 싹둑 잘라낸 배짱이 하도 가상해서 하는 얘기들이다.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고 굳이 미국에까지 가서 세미나를 열어야 하느냐는 등의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의원 ‘나리’들을 초청하지 않은데 대한 ‘괘씸죄’ 적용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내용을 모르면 들으면 될 일이고, ‘안방’에서만 놀자고 목청을 높이려면 도의원이라는 짐을 벗고 집에 가면 된다.

이들에게 화해와 상생의 4·3 특별법정신이며 세계 평화와 인권,‘평화의 섬’이라는 궁극적인 제주의 미래비전을 얘기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는 푸념도 들려온다.

새삼스럽게, 이번에 확실하게 가다듬었다는 한 공무원의 철칙.

“도의원 ‘나리’들의 눈높이를 벗어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아예 꿈꾸지 말라. 혹시 외국에 가야할 일이 있거들랑 도의원 ‘나리’들부터 먼저 모셔라”<오석준·정치부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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