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 신고된 1만4028명의 희생자 중 78.1%인 1만955명이 토벌대에 희생됐다는 사실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행위’라는 4·3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해주는 대목이다. 가해자를 표시하지 않은 희생자가 9%(1266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은 12.6%(1764명)에 불과하다. 이는 희생자의 80%의 이상이 토벌대에 희생됐다는 미육군사령부의 「제주도사건종합보고서」와 맥을 같이 한다.

>7< 피해 실태
4·3 진상조사보고서는 1947년 3월1일부터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된 1954년 9월21일까지 7년7개월동안 발생한 4·3 희생자(사망·실종자)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제주도 인구 10명 가운데 1명이 희생을 당한 것이다.

이는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2만7719명과 1949년 6월∼1950년 4월 신문·국무회의록·미대사관문서 등 다양한 자료, 한국전쟁이후 발행한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 3000명, 인구변동 통계 등을 감안한 것이다.

4·3 위원회 신고 희생자에 대한 시기별·연령별·가해자별 분석은 4·3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중산간초토화를 통한 강경진압작전이 진행된 시기인 1948년 10월∼1949년 3월까지 전체 신고자중 80% 이상이 희생됐다. 10세 이하 어린이가 5.8%(814명), 61세 이상 노인 6.1%(860명), 여성 21.3%(2985명)에 이르는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과도한 무차별진압이 이뤄졌음을 드러낸다.

4·3 진압과정에서 전사한 군인과 경찰은 각각 180명·140명 내외로 추정되고, 서청·대청·민보단 등 우익단체 희생자들은 국가유공자(4·3관련 보훈처 등록자 639명)로 지정됐다.

마을공동체 파괴와 소실, 공공시설·산업 피해 등 물적 피해도 엄청났다.

줄잡아 300여개 마을에서 2만여호가 이재민이 됐고 가옥 4만여동이 소실됐다. 이 가운데 84개 마을은 폐허가 돼 ‘잃어버린 마을’로 사라져갔다.

77개 학교·321개 교실 등 학교를 비롯한 관공서와 공공시설 피해, 경제활동 중단 등으로 인한 산업피해와 높은 실업률(49년 5월 현재 28.8%) 등은 도민들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했다.

사망·행불자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유족들에게 대물림돼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했던 연좌제에 의한 피해는 도민공동체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4·3관련 수형자들에 대한 보안감찰, 유족의 각종 입학·취직시험 및 직장에서의 불이익, 출입국 제한 등이 전형적인 사례다. 연좌제는 공식적으로 지난 1981년 폐지됐지만 유족들을 여전히 유·무형적인 피해의식 속에 옭아매고 있다.<4·3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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