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제주4·3을 통해 한반도 평화·인권문제를 재조명하는 국제교류의 장이 미국에서 열렸다. 미국 현지시각 24일 오후 6시(한국시각 25일 오전 4시)에 개막된 ‘제주4·3과 동아시아 평화’ 국제학술대회는 26일까지 3일간의 일정으로 6개의 소 주제를 갖고 진행됐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한국문제 전문가인 브루스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와 「제주도반란」의 저자 존 메릴(미국 국무성) 등이 참가,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문제를 강도 높게 제기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제주4·3 진상규명의 현대사적 의의(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제주4·3은 미군정의 실정이나 극우 경찰·청년단의 횡포와 관련해서 한반도의 축소판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주도와 4·3은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제주4·3은 △봉기와 반란의 성격 △항쟁의 성격 △집단학살의 성격 등 3가지의 중요한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집단학살은 명백히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유엔은 제노사이드(집단학살)와 같은 범죄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고 범행일시에 관계없이 소추가 가능하다고 규정한 만큼 이런 결정은 4·3진상규명에서 존중돼야 한다.

또한 4·3진상규명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자리잡게 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반드시 요구되며, 휴머니즘이 숨쉬는 사회를 이루는데 필수적이다. 이와 함께 남북화해와 더 나아가 통일로의 길을 닦는데 주춧돌이자 디딤돌로서의 민족사적 역할을 할 것이다.

1948년 분단정부의 수립이 코앞으로 다가섰을 때 제주도민들은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김구 등의 남북협상을 열렬히 성원했다. 이런 점만으로도 4·3과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은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4·3진상규명은 남과 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고, 하게끔 돼 있다.

▲‘제주4·3특별법’에 따른 활동과 이후 과제(강창일 배제대 교수·제주4·3연구소장)=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4·3논의가 분출되는 과정에서 ‘항쟁’과 ‘공산 폭동’이라는 개념 외에 ‘인권과 평화’라는 제3의 새로운 화두가 등장하게 된다.

이는 4·3을 양민학살이라고 규정하는 대다수 도민의 정서에 부합됐고 이념의 잣대로 4·3을 재단하는 종래의 한계와 장애를 해소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99년 12월 「4·3특별법」이 제정됐다. 이는 제주도민은 물론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한 민주·양심세력의 오랜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특별법은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더구나 수구세력의 집요한 훼방으로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한 단계 제고시킬 참여정부가 탄생했다. 대통령은 후보시절 약속한 공약을 실천해야 한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제주도민에게 국가원수 자격으로 사죄해야 한다.

아울러 4·3위원회는 법에 명시된 대로 명예회복의 과제를 즉시 수행해야 한다. 4·3당시 3만명 이상이 학살당했는데 실제 신고는 1만4000여명에 불과하다. 이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 등의 결과다. 또한 재일동포의 신고가 불가능했던 점도 한몫 했다.

아울러 희생자 추가 선정과 민간인 주도의 평화공원이 조성되기 위해서는 특별법을 개정, 제대로운 명예회복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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