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찾아오는 제주의 봄 4월엔 늘 슬픔이 고였다. 그러나 올해의 4월은 기쁨이었다. 행정수반 고건 국무총리가 4·3영령 추모 제단을 찾아와 헌화 분향하고 추도사를 올렸기 때문이다. 겨울 추위가 매서워야 봄이 더욱 싱그럽다. 고 했는데 오랜 세월 얼어붙었던 4·3이 완연한 봄을 만났으니 얼마나 싱그러운가.

반세기를 넘기고서야 기피의 대상이던 4·3을 나라가 끌어안았다. 지루하고 답답한 세월이었지만 그새 세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웅변하는 한 장면이었다. 입에 올리기만 해도 죄가 되던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에겐 감격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환희의 해방 언저리에서 남로당에 의해 저질러진 4·3사건, 그 진압 과정에서 무자비한 학살, 그것을 되새긴다는 것은 고통일시 분명하다. 무장대에 시달리고 토벌대에 쫓기고 집은 불태워져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 들로 산으로 내몰린 사람들, 부모라는 게 죄가 되고, 자녀라는 게 죄가 되고, 형제라는 게, 애인이라는 게, 친구라는 게, 할아버지요 할머니라는 것까지 모두 죄가 되어 죽어갔으니, 슬픔이 한으로 맺힐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던가.

혹, 죽지 않고 살아남았어도 산 게 아니었다. 오랜 연좌제의 한파로 고통은 끊일 날이 없었다. 기가 막혀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봄은 오게 마련인 것처럼, 드디어 제주의 봄은 찾아왔다. 여야 합의에 의한 4·3특별법의 제정 공포로 봄이 시작되어,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채택으로 꽃을 피웠다. 한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입었던 외투를 벗어 버려야 할 때이다. 4·3의 무거운 짐을 부려 놓고 어깨춤이라도 추어야 할 게 아닌가.

이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인권이 무시되던 지난날의 역사를 인권이 존중되는 오늘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편가르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미움과 증오를 떨쳐버릴 수가 있다. 상대를 따뜻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가 있다.

수용이란 무엇인가. 용서다. 나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기가 없으면 용서할 수 없다. 고 말한다. 용기란 무엇인가. 굳센 기운이요 힘이다. 남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힘이다. 그 힘으로 마음 속에 타오르는 증오와 분노의 불길을 잠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상대를 용서할 수가 있다. 용서! 얼마나 따뜻한 말인가. 얼마나 너그러운 말인가. 얼마나 힘이 솟는 말인가! 용서는 화해를 낳고 상생의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때로 본다. 4·3 해결을 더디게 한다 하여, 반민족 반통일 수구세력이라 매도하는가 하면, 폭동을 거론하고 항쟁을 내세우며 입씨름을 벌인다. 이런 말들은 분열의 씨앗일 뿐 화해나 상생과는 거리가 먼 말들이다.

4·3특별법의 기본정신은 용서와 화해와 상생이다. 이는 어느 편을 승자로, 어느 편을 패자로 구분 지으려 함이 아니다. 모두가 승자요 너와 내가 함께 이익을 보게 하는 법이다. 그게 바로 상생이 아닌가. 상생은 사람들을 참으로 편안케 한다. 평화의 어머니인 까닭이다.

이제 4·3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다. 어두움이 아니라 밝음이다.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겨울이 아니라 봄이다. 과거의 혹한을 이겨내고 얻어진 봄이요 행복이요 기쁨이다. 4·3영령들의 희생을 딛고 얻어진 보물, 그 이름을 평화라 해야 할 것이다. <조명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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