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1 발포사건부터 1954년까지 수천명이 4·3과 관련해 형을 언도 받아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과 1949년 253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군법회의는 재판서·공판조서 등 소송기록이 없고, 재판이 없었거나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이 통보되는 한편 이틀만에 345명을 사형선고 하는 등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4·3진상조사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역사적 기록은 4·3 수형인과 후유장애인 등을 희생자로 선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9< 수형인·후유장애자 희생자 지정
4·3희생자 심사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에 군인·군속이 아닌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가 열렸다는 것이다.

1948년에는 11월17일부터 12월31일까지 비상계엄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무리한 감금과 민간인에 대한 군법회의 집행이 가능했다.

이들은 계엄령이 없었다면 즉시 석방되거나 일반 재판에 회부돼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밟았을 사람들이었다. 실제 이들중엔 무장대 활동을 했거나 남로당 핵심간부였던 사람들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1949년의 군법회의 때도 산으로 피신했다가 하산한 중산간 지역주민들에게 사형·무기징역 등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들 재소자의 기록은 공란으로 처리돼 재판서 등 소송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서울·인천·대전·대구·전주·목포 등의 형무소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희생일시와 장소·경위 등이 확인되지 않아 유가족들은 그들을 행방불명자로 신고했다.

따라서 4·3특별법에 따라 희생자로 신고된 군법회의 유죄판결자 1443명에 대한 희생자 심사와 4·3당시 공권력의 인권유린 참상을 규명하는데 이같은 사항이 반영돼야 한다.

사실상 군법회의가 법적 절차 없이 형식적으로 치러진 재판이었다면 군법회의 대상자를 ‘수형인’으로 부르는 것도 문제이며 형무소에 수감된 것도 ‘불법 감금’으로 봐야 한다.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수는 1만4028명으로 4·3위원회에 넘겨진 희생자 심의대상은 55.1%인 7730명. 하지만 총 피해자의 20%인 2778명만이 지난해 11월 20일(1715명)과 올해 3월 21일(1063명) 희생자로 결정됐다.

지난 3월21일 이후 심사소위를 통과, 위원회의 최종 결정을 앞둔 희생자도 현재 351명에 불과하다. 이처럼 희생자 심의가 늦어지면서 후유장애인으로 신고된 142명 가운데 7명이 사망했다.

그나마 4·3보고서 채택이후 4·3희생자심사소위가 수형인 18명과 국가유공자 3명을 희생자로 잠정 확정한 것은 ‘화해와 상생’이라는 4·3특별법 취지를 살린 진일보한 결정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4·3 인명피해가 2만5000∼3만명으로 추정되는 점을 감안, 연좌제로 인한 피해의식 등으로 신고를 하지 못한 희생자 유족들에게 추가 신고 기회를 줘야 할 것이다.

<4·3 특별취재반=오석준 정치부장 대우, 김석주 사회부차장 대우, 이태경·좌용철·현민철·박미라 기자>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