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현장 교육장으로 남겨야

4·3을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으로 몰고간 주민 집단살상은 1948년 가을부터 시작된 중산간 초토화와 예비검속, 군법회의 등에서 비롯됐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집단총살·암매장된 예비검속자와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된 수형인들은 대부분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채 구천을 헤매고 있다. 4·3 유적지를 후세들이 역사를 통해 교윤을 배우는 산 교육장으로 보존하는 일도 서둘러야 할 과제다.

>12< 집단 매장지·유적지 발굴·보존

1948년 11월부터 시작된 중산간 초토화 작전속에 조천 교래리와 애월 하가리, 애월 소길리 원동, 표선 토산리 등 도내 중산간 마을 곳곳 주민들이 무자비한 토벌에 숨져갔고, 해변마을로 내려와도 도피자 가족이나 무장대 협조 등등의 명분하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무장대와 토벌대를 피해 입산했던 제주 용강리, 애월 어음리 빌레못굴, 조천 선흘리 반못굴·밴뱅디굴 등에서도 주민들의 집단 희생이 이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예비검속자 수백명이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 등지에서 집단총살을 당했고, 제주시 정뜨르 비행장은 일상적인 학살이 자행됐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법 재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거나, 예비검속 수감자들이 이 곳에서 처형, 암매장됐다는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군법회의를 거쳐 전국 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던 수형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픈 과거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최근 제주도와 4·3연구소, 4·3 유족회 등을 중심으로 집단 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조사에 따른 전수조사를 벌이는 한편 학살터로 알려진 제주시 ‘정뜨르 비행장’에 대한 발굴 조사를 준비하는 정도다.

4·3 진상규명위원회가 집단 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하고, 특히 유해 발굴절차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존엄성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해 시행할 것을 건의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집단 매장지는 현장 증언이 가능한 목격자들이 연로하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시점이어서 발굴·보존 사업의 시급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와함께 집단매장지가 발굴될 경우 막대한 비용이 들더라도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가능한 시신을 유족들의 품으로 돌려주는 것이 억울한 영혼들의 한을 다소나마 달래주는 방안이 될것이다. <4·3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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