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흘리에 위치한 경찰동원주 둔지.  
 
<프롤로그>
50년 한(恨)을 품은 채 방치되고 있는 제주4·3의 유적지를 찾아 나선다. 이들 4·3유적지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50년 전 제주를 붉게 물들였던 4·3의 역사를 오롯이 품어 안은 곳이기도 하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4·3진상규명위원회는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토록 정부에 건의해놓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소 늦었지만 이 기획을 통해 4·3유적지 분포와 현황을 추적하는 한편 4·3유적지 보존과 체계적인 관리방안까지 모색해 본다.

제주4·3이 남긴 상처는 반세기를 넘긴 지금에도 아물지 않고 있다.
특히 4·3을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으로 몰고 간 집단살상은 1948년 가을부터 시작된 중산간 초토화작전과 예비검속, 군법회의 등에서 비롯됐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집단 총살·암매장된 예비검속자와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된 수형자들은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구천을 헤매고 있다.
4·3유적지를 후세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3월29일 정부 차원의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채택은 반세기동안 멍울이 졌던 유족들의 한이 다소나마 풀리는 계기가 됐다.

더구나 4·3진상규명위원회가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하고, 유해발굴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존엄성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해 시행할 것을 건의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픈 역사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걸음마 수준에 머물고 있다. 특히 집단매장지는 현장 증언이 가능한 목격자들이 연로하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시점이어서 발굴·보존 사업의 시급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와 함께 집단매장지가 발굴될 경우 막대한 비용이 들더라도 유전자검사 등을 통해 시신을 유족들의 품으로 돌려줘 억울한 영혼들의 한을 다소나마 달래줘야 한다.

이런 가운데 제주도 4·3사건지원사업소와 4·3연구소가 지난해 12월부터 유적지 전수조사를 벌이고 있어 그나마 유족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
시·군별로 파악된 4·3유적지는 대략 170여 곳. 잃어버린 마을이 84곳으로 가장 많고, 희생터 51곳, 주둔지 12곳, 은신처 6곳, 역사유적과 비석·성터 25곳 등이다.

4·3유적지 전수조사 과정에서는 새로운 유적지가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4·3유적지 역시 개발 바람에 하나둘 파헤쳐지고 황폐화되면서 원형을 크게 잃고 있다.
북제주군 조천읍 대흘리에 위치한 동원주둔지. 경찰토벌대가 주둔했던 이곳은 가로 30m, 세로 15m의 성을 쌓았었지만 지금은 성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성벽의 밑굽과 일부 성터만이 50년 전 역사를 희미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인근 목장 개발로 정비를 하고 있어 언제 말끔히 사라질지 모를 운명에 처해 있다.
동부관광도로 맞은 편에 위치한 ‘총 맞은 비석’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1865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와흘·선흘·대흘·와산 등 4개 마을 주민들이 목사와 판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비석 4기에는 기이하게도 총탄 흔적이 수없이 많다. 4·3당시 동원주둔소에 주둔해 있던 토벌대들의 사격연습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150년 가까이 된 문화재급 비석에다 4·3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계적인 보존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4·3유적지 발굴·조사작업은 긴 여정이다. 오는 8월쯤 돼야 제주시와 북제주군 지역에 대한 전수조사가 마무리된다. 그 다음에 연말까지 서귀포시와 남제주군 등 산남 지역 전수조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유적지 발굴·조사작업은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파악해야 체계적인 보존관리를 통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후세에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4·3은 말한다」를 통해 아픔의 역사를 말해왔던 제민일보가 이제는 ‘평화와 상생’이란 4·3의 미래비전을 향한 그 길에 어깨를 함께 걸고 나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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