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에서 제주여성사 정립을 주요 과제의 하나로 선정했다.역사는 문제제기와 함께 시작한다.문제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제주여성사는 이 땅에 살아 온 여성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그 나름대로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집단임을 인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구태여 여성만을 따로 떼어내어 이야기 할 필요가 있는가? 여성사가 있다면 남성사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물음은 이제 어리석은 질문이다.여성사는 여성해방론자의 관심을 넘어섰다.그것은 이미 1980년 루마니아 세계역사학대회의 주제로 다루어졌고,오늘날 구미 각 대학에서는 정규과목으로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 풍토에서는 여성사란 왠지 낯설기만 하다.여성사에 대해 반감이나 거부감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필요성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사가 과연 필요한가? 한마디로 필요하다.그것은 지금까지 역사에서 여성들의 삶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도덕적 배려나,잃어버린 인류의 반쪽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역사의 신 클리오 앞에 바친 모든 역사가의 맹세이다.이를 위해 역사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름없는 사람들의 탄식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동사를 통해 노동자들의 땀 흘리는 건강한 삶의 의미를 복원하고,제국주의 침략사를 통해 약소민족에게 행한 식민지 열강의 반인류적 만행을 규탄한다.

그렇다면 역사가들은 무엇 때문에 여성사를 쓰는 것일까? 그것은 잃어버린 문명을 발굴해내는 고고학자처럼 가부장적 권위의 굴레속에서 영원히 묻혀버릴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삶을 찾아 진실을 규명하려는 클리오와의 약속 때문이다.

지금까지 역사책에 여성의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그러나 그것은 모성이나 부덕을 강조하고 그 희생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향수를 이끌기 위한 것으로서 너무마 현학적이고 기만적이다.

여성사가들은 남녀간의 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역사에서 배제되어 왔던 대다수 인간의 역할을 복원시켜 진정한 인간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서임을 강조한다.역사는 말 그대로 히즈스토리(his-story)였다.이제 역사는 허스토리(her-story)의 시각에서 과거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이 생긴다.

제주여성사 정립도 바로 이땅의 여성들이 고통과 슬픔의 매서운 절정에서도 힘에의 의지를 부여했고,그럼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제주역사의 원동력이라 믿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제주여성사의 시작이자 끝이다.

요즘 시민들의 정치참여운동이 지금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약속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더 밝은 미래를 보장해 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성원을 보낸다.

마찬가지로 제주여성의 삶을 새롭게 클리오의 신전에 등재시키려는 노력이 당장 어떤 결실을 기대하기보다는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 줄 지침이 되리라는 신념을 갖고 성원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김은석·제주교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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