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우리나라가 미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하겠지만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우리사회의 뿌리깊은 사대주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강대국들의 의도적인 정책에도 원인이 있었다.

전쟁으로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한국사람들은 미국만이 한국을 부흥시켜줄 은인의 나라라고 여겼다. 그래서 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을 가리키는 말 앞에는 혈맹이나 동맹·동반자·우정과 같은 수식어가 반드시 따라 붙었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 중에는 이러한 우리 국민의 사대사상을 실랄하게 꼬집은 사람들이 많았다.

유진오박사는 「미래를 향한 창」이라는 책에서 “미국은 임진왜란때 이른바 천병(天兵)을 보내 조선을 구촐해줬다는 명나라와 같이 미국을 6.25동란에서 구해준 구세주로 인식하게 했다. 그렇게 미국은 자신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미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깊이 심어줌으로써 한국의 자립심을 혼미케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우리의 이같은 사고를 어떻게 보았을까.

미국은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의 전쟁으로 여겼고 한국민을 기생충처럼 생각했다. 그것이 한때 ‘구걸심리론’시비로 비화되기 까지 했다.

새 천년에 처음 치러진 선거가 끝나고 273명의 선량들이 여의도 입성을 기다리고 있다. 어찌됐든 국회의원들은 4년의 의정생활 내내 자신을 당선시켜준 지역구민들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당선인사를 소홀히 해도 흠이고 지역구를 돌아보지 않아도 욕을 먹는다. 동네 길을 제때 닦아주지 않아도 국회의원 탓이다.

이제 유권자부터 달라져 보자.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지역구의 일을 전혀 신경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구민들 먼저 국회의원들의 그러한 굴레를 벗겨주어야 한다. 구걸해야만 살아갈 수 없었던 50년대도 아니고 골목길을 닦아줘야 표를 주던 시대도 아니다.

제주출신 국회의원들이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괸당정치’‘구걸정치’라는 우리들의 정치문화도 크게 달라지리라 본다. 그것이 인물을 키우는 길이며 참다운 대의민주정치를 실현하는 길이다. 물론 지역의 이익을 외면하라는 것은 아니다. 보다 큰 정치의 토양을 만들어가자는 말이다.<김종배·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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