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이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발상지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인 정치를 주창했다.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대중에 의한 정치가 될 우려가 많으므로 현명한 철학자가 임금이 되어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누가 현명한 철인인지 검증할 방법상의 어려움 때문에 오늘날 이 주장은 민주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으로 그 용도를 다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이 생각이 절실한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국민을 섬기는 머슴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을 국회로 보내달라고 간청하지만 막상 선거만 끝나면 그 머슴들이 상전의 상투 끝에 올라앉아 거들먹거리며 살림을 거덜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국민들이기에 선거라는 행사가 그저 통과의례일 뿐 국민에게 희망과 삶의 보람을 주는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한 때 총선시민연대에서 낙천 대상자 명단과 사유를 공표하면서 엄청난 국민적 지지가 몰리자 "이번에는 뭔가 달라질 것인가?" 하고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망국적 지역감정과 시대에 역행하는 색깔론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역시나" 쪽으로 마음을 접게 된다.

그 놈이 그 놈, 그래도....

그래서 선거 이야기는 늘 "그 놈이 그 놈이지." 하는 자조적인 결론으로 끝나고 만다. 누가 되더라도 그 밥에 그 나물이므로 일찌감치 기대를 접고 마치 속세를 초월한 도사나 되는 양 무관심을 자랑으로 삼거나, 아니면 재빨리 자기 잇속이나 차리려고 괸당과 동창, 동향을 편들게 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 놈이 그 놈이라면 나와 연고가 있는 사람, 나중에 청탁 하나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뽑고자 하는 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사이에 나의 사회의식이 마비되고, IMF로 나라가 거덜나 나와 자식들, 이웃들이 고통을 겪게 된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의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며, 어리석은 우리 대중이 선동가들에게 부화뇌동하여 연고주의에 표를 던져 준 탓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자기 발등을 찍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최소한 나의 한 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 그 놈에게 던지던지 쓰레기통에 버리던지 해야겠다.

후보자의 정보공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이번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유권자들에게 제동한다는 차원에서 사면되거나 실효된 전과기록을 포함하여 모든 전과기록을 공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부에서는 일정기간이 지나거나 사면을 통해 말소된 전과기록을 공개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억울해 한다지만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을 막고 유권자들에게 판단기준을 마련해 주는 공익적 차원에서 적어도 총선에 출마하려는 자들은 자진해서 자신의 전과를 공개하고 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다만 금고 이상의 형으로 제한을 두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서민들보다 유리한 판결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만큼 기소중지나 선고유예의 경우도 공개해야 옳을 것이다. 제주지역 총선연대에서는 병역문제, 납세문제 뿐 아니라 그 동안의 활동 경력과 개혁성, 도덕성까지 객관적 검증이 가능한 모든 사항을 조사하여 곧 공개할 것이라고 한다. 제주의 경우 지역이 좁아 비밀이 없는 탓인지 충격적인 사안은 없을 것으로 보이나 부동산 투기 의혹 등 재산증식과정의 의문점과 등록된 재산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은 세금 납부와 의료보험료 등의 실상도 공개될 것이며, 저마다 4.3의 해결사를 자처하지만 그 해결을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해 왔는지도 밝힐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민주화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는지, 의정활동 대신 오락을 즐기지는 않았는지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총선은 성인군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출마자 중에서 가장 나은, 아니 조금 덜 나쁜 사람을 택하는 정치행위이며, 그 행위가 개인의 범주를 넘어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도 크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그 놈이 그 놈'이라고 쉽게 포기해버려서는 안 된다. 눈이 아프더라도 공개된 여러 정보를 숙지하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의에 입각하여 귀한 나의 한 표를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선거는 희망의 축제가 되고 참된 민주주의의 꽃이 될 것이다. <임문철·서문성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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