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스물, 중산간 농촌마을 교래리로 시집을 왔지요.피농사 하나로 입에 풀칠 하면서도 남편과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가정은 단란했지요.적어도 48년 11월13일 전까지는.첫번째 군인들이 들이닥쳐 불을 지르자 딸은 포대기에 업고 9살난 아들과 함께 부엌으로 피신했지요.다시 다른 군인들이 들이 닥쳐 살려달라고 비는데 총을 쏘아 내 옆구리를 관통시켰지요.

가슴을 정통으로 맞은 아들은 심장이 다 나올 정도였고,혼이 나간 상태에서 등에 업힌 딸을 내려보니 딸의 무릎이 총알에 뻥 뚫려 있었지요.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등에 업혀 있던 딸의 왼쪽 다리까지 부숴놓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때가 딸의 생애 두 번째 맞는 생일날이었지요.왜 그때 죽지 못했나 생각 뿐이지요.”

 양복천 할머니.4·3당시 중산간 초토화 작전으로 1백가호밖에 없던 마을이 하늘땅 불바다를 이루던 비극의 날 이야기다.그 현장에 있었던 스물아홉 그녀가 여든 셋의 할머니가 되어 법정에서 선서를 하고 증인 신문이란 것을 해야 했다.

 지난달 27일 오후 2시 제주지방법원 제1호법정.당시‘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내용을 보도한데 대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씨가 제민일보를 상대로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 5차공판에 피고측 증인으로 나와 앉은 것이다.

 그날은 딸이 생애 두 번째 맞는 생일날이었다 한다.그리고 그때 희생된 대부분은 재빨리 도망치지 못한 노약자와 부녀자,그리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했다.

 죽은 애긴 가슴에 묻으면 됐으나 살아있는 상처는 더 큰 상처가 되는걸까.이제 56살 불구가 된 딸만 보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진단다.무슨 죄였을까.설마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에 미처 피신을 못하고 그냥 집에 있었던 것이 죄라면...옆구리에 흉터 박힌 채로 오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 죄라면...무고한 사람들이 죽어야 할 이유를 몰랐고,죽어야 하는 법이 있는지를 몰랐다.

 죄가 있다면.감금당한 침묵으로 살았던 죄 밖에 없다. 야만과 광기의 세월을 살아낸 죄밖에 없다.

 그 작고 여린 몸을 이끌고 법정에 나선 그녀는 그날 이후 빼앗긴 청춘의 세월과 참혹했던 피울음의 기억 안으로 또랑또랑 걸어 들어갔다.“무사 피눈물이 안 납니까”증언후 그녀의 소감이었다.

 눈이 쌓여 온 세상이 하얗던 49년1월,어머니와 같이 끌려가던 4살,6살,8살 동생이 군인들에게 끌려가다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던 당시 11살아이였던 의귀리 김홍석씨.착한 마을사람들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기막히고 그때 끌려가던 어머니의 쇠울음...어찌 잊겠는가.

 표선면 가시리에 살던 열여섯살이었던 오국만씨는 중산간 지역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생활을 했고,도피자 가족이라는 죄명으로 부모가 학살됐고,억울하게 죽은 사람만 76명이라고 증언했다.

 지난해 결국 4·3특별법이 제정됐다.특별법 제정후 맞는 새천년을 4·3의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는가.제주섬에 살았기에 억울하게 죽어가야 했던 넋들이다.

 억울한 영혼들을 위무하는 일은 이땅을 떠나 이제 전국화돼야 한다.학살된 그 수만의 고혼들을 부활시키는 일에 온 국민의 마음이 모아져야 한다.어떻게 그들의 상처가 그들만의 일인가.그들 마음으로 돌아가 아직도 계속되는 슬픔과 상처를 끌어안지 않고 봄날 제주를 이야기 하겠는가.

 봄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살아오르는 옛 흉터와 함께 사는 이 땅의 희생당한 사람들,행방불명된 이들의 유족들에게도 화사한 사월의 봄은 왔다.피울음을 삼킨 채 흐드러지듯. 무덤밖으로 이제 봄풀들이 자라나 대지를 달래지만 오래된 기억을 치유할 수 없다.덤불도처에 쇠못처럼 박힌 벽을치는 통곡과 아픈 기억들을 어떻게 달랠 수 있으랴.

 올해처음으로 4월1일부터 9일까지 4·3주간이 선포됐다.비극의 대천바당을 돌아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올해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아야 할 일이다.

 개나리 꽃바람 총총 눈뜨고 16대 총선바람이 어지러이 부는 2000년 어느 봄날, 법정에선 이름없는 중산간 지역 노인들 다섯명이 나와 반백년 묻은 흉터를 증언했다. 돌아서면서 삼키던 눈물이 있었다.<허영선·편집부국장대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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