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하니 1947년 5월 경비사관학교 4기생으로 입학, 1948년 군번 10669로 소위에 임관되어 제2연대 소대장으로 출발하였지요? 동년 4·3사건이 일어나 12월 29일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가 제주농업학교에 주둔, 또 동연대 제1대대(대대장 전부일)는 이듬해 1월 이동하여 대대본부는 서귀포에 두고 예하 제1중대는 중문에 배치하여 안덕, 대정면에 각각 1개 소대씩 주둔시켰다. 바로 당신의 제2중대는 남원면에, 제3중대는 법환리에, 제4중대는 예비대로 두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외다.
중대장 설재련은 의귀(衣貴)초등학교에 주둔, 부하 일등상사 문석춘(文錫春), 일등중사 이범팔(李範八), 이등중사 안성혁(安星赫)과 임찬수(林燦洙) 등이 재산(在山) 공산 유격대의 습격으로 순직당하는 참변이 일어났소. 국가가 반도를 잡도록 준 총칼로 아녀자(兒女子)까지 포함한 양민에게 보복 살상을! 너무도 했소. 설장군! 이보다 큰 죄악이 어데 있소. 하늘이 무섭지 않았소. 제주 사람 섬 놈이라고 얕잡아 깔본 것이 아닐까요! 당신은 이 섬보다 작은 진도에서 태어났지요.
1949년 1월14일자 주한(駐韓) 미군사령부의 「G-2 일일보고서」에 1월12일 새벽 6시 30분께 약 200여명의 유격대가 의귀(衣貴)리에 있는 제2연대 제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퇴(敗退)하였다. 두 시간에 걸친 접전끝에 유격대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 당하였다. 유격대로부터 M-1 소총 4정, 99식총 10정, 칼빈총 3정을 노획하였다. 고 한 기록으로 보아 2명은 전사하고 2명은 부상당한 후 사망한 듯하오.
이 일로 흥분한 2중대 군인들은 유격대를 추격하기 보다 의귀교에 수감중인 수십명을 쏘아 구덩이에 방치했다지요. 수개월 뒤 마을로 복귀한 주민들은 구별할 수 없는 유해를 3개묘로 만들어 모시고 유족들은 1983년에 와서 현의(顯義) 합장묘라는 비문을 세웠다는 사실을 장군은 모슬포에서 들었지오.
장군! 한국전쟁 발발 후에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소장 백선엽 준장) 후생감찰로 발령받아 소령으로 진급, 또 제주도 위수지구 사령부의 고등군법회의 심판관으로 발령, 후일 준장으로 예편되어 캐나다로 이민 갔었지. 경비사관학교 4기생 가운데 장군 진급자가 10명인데 유독 설준장만이 이민 갔는데 이는 도민의 분노가 하늘에 구쳐 그 소리가 그대의 귓전을 두드렸으리라.
옷귀의 오교장!‘70리, 서귀포를 아시나요’라는 글에 이어 또‘현의 합장묘를 아시나요’를 쓰게 되었군. 오교장! 이 섬에서 남북평화 축전이 있게 되는데 우리는 그 때 유격대의 죽음, 국군의 순직, 학살당한 양민, 난폭자의 잔인성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건너야 할 강이 너무나 벅차오. 이런 각 사단(事端)과 평화 축전을 어떻게 하는 길이 지혜로운 일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구나!
<김찬흡·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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