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薛) 장군! 전공을 세워 준장까지 진급하면서 국방에 전념한 일에 대하여 폄하(貶下)하고 싶지는 않소. 다만, 지난 9월16일 남원읍 의귀리에서는 수십구의 시신을 이묘한 기사를 보고 나를 경악하게 하였소. 더구나 현지의 오(吳) 교장으로부터‘目不忍見’(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이라는 전화를 받고 더욱 심장이 고동쳤소. 당신의 성명 석 자를 기억하게 된 것은 4·19 이후“재산 전부를 군(軍)에 의해 소각당하고 무조건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책임자는 제2연대 1대대 2중대 중위 설재련(薛在連)”이라는 문건이었지요.

보자하니 1947년 5월 경비사관학교 4기생으로 입학, 1948년 군번 10669로 소위에 임관되어 제2연대 소대장으로 출발하였지요? 동년 4·3사건이 일어나 12월 29일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가 제주농업학교에 주둔, 또 동연대 제1대대(대대장 전부일)는 이듬해 1월 이동하여 대대본부는 서귀포에 두고 예하 제1중대는 중문에 배치하여 안덕, 대정면에 각각 1개 소대씩 주둔시켰다. 바로 당신의 제2중대는 남원면에, 제3중대는 법환리에, 제4중대는 예비대로 두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외다.

중대장 설재련은 의귀(衣貴)초등학교에 주둔, 부하 일등상사 문석춘(文錫春), 일등중사 이범팔(李範八), 이등중사 안성혁(安星赫)과 임찬수(林燦洙) 등이 재산(在山) 공산 유격대의 습격으로 순직당하는 참변이 일어났소. 국가가 반도를 잡도록 준 총칼로 아녀자(兒女子)까지 포함한 양민에게 보복 살상을! 너무도 했소. 설장군! 이보다 큰 죄악이 어데 있소. 하늘이 무섭지 않았소. 제주 사람 섬 놈이라고 얕잡아 깔본 것이 아닐까요! 당신은 이 섬보다 작은 진도에서 태어났지요.

1949년 1월14일자 주한(駐韓) 미군사령부의 「G-2 일일보고서」에 1월12일 새벽 6시 30분께 약 200여명의 유격대가 의귀(衣貴)리에 있는 제2연대 제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퇴(敗退)하였다. 두 시간에 걸친 접전끝에 유격대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 당하였다. 유격대로부터 M-1 소총 4정, 99식총 10정, 칼빈총 3정을 노획하였다. 고 한 기록으로 보아 2명은 전사하고 2명은 부상당한 후 사망한 듯하오.

이 일로 흥분한 2중대 군인들은 유격대를 추격하기 보다 의귀교에 수감중인 수십명을 쏘아 구덩이에 방치했다지요. 수개월 뒤 마을로 복귀한 주민들은 구별할 수 없는 유해를 3개묘로 만들어 모시고 유족들은 1983년에 와서 현의(顯義) 합장묘라는 비문을 세웠다는 사실을 장군은 모슬포에서 들었지오.

장군! 한국전쟁 발발 후에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소장 백선엽 준장) 후생감찰로 발령받아 소령으로 진급, 또 제주도 위수지구 사령부의 고등군법회의 심판관으로 발령, 후일 준장으로 예편되어 캐나다로 이민 갔었지. 경비사관학교 4기생 가운데 장군 진급자가 10명인데 유독 설준장만이 이민 갔는데 이는 도민의 분노가 하늘에 구쳐 그 소리가 그대의 귓전을 두드렸으리라.

옷귀의 오교장!‘70리, 서귀포를 아시나요’라는 글에 이어 또‘현의 합장묘를 아시나요’를 쓰게 되었군. 오교장! 이 섬에서 남북평화 축전이 있게 되는데 우리는 그 때 유격대의 죽음, 국군의 순직, 학살당한 양민, 난폭자의 잔인성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건너야 할 강이 너무나 벅차오. 이런 각 사단(事端)과 평화 축전을 어떻게 하는 길이 지혜로운 일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구나!

<김찬흡·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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