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옷엔 제주인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지요"

[허영선이 만난 사람]복식학자 고부자

2008-09-25     허영선

 옷은 시대의 얼굴이다. 복식에는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냄새가 절절하다. 땀과 호흡이, 역사가 흐른다. 이름 모를 옛사람의 출토복에서 한 시대를 유추해내고, 삶의 양식을 밝혀낸다. 과학문명의 시대, 손으로 한땀 한땀 세고, 올을 세는 바느질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사람. 제주출신 복식학자 고부자 교수. 1968년부터 그는 우리 땅 구석구석을 밟았다. 거의 쓰여지지 않았던 민중의 의생활사를 채집하기위해서였다. 출토유물 현장에 30년, 우리옷 연구에 40여년 외길. 그의 이름 석자면 고증이 확실한 복식학계에서 그는 호락호락 하지 않기로 이미 이름났다. 이제 그도 내년이면 정년퇴임. 그의 스승 어머니의 고향에 특강차 들른 그를 만났다.

# 출토유물 30년, 우리옷 연구 40년 외길 인생

   
 
 

 고부자는

 1944년생. 제주시 오라동.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 경기도 문화재위원. 사단법인 제주학회 회장·이사장 역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제주대사범학교 졸업, 동덕여대, 국제대학 가정과 졸업, 이화여대 대학원(가정교육), 단국대 대학원(사학전공). 서울여대 「제주도 의생활의 민속학적 연구」로 박사학위. 1978년부터 단국대 민속학연구원 및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연구원으로 시작, 민속학연구소장을 역임하고 현재 단국대학교 전통복식연구소장. 1990년과 1994년에는 미국 피바디·에섹스박물관 소장 우리 나라 유물의 정리요원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저서로 「우리생활 1백년-옷」(현암사)과 수십편의 공저가 있다.

 
 
"어느 시대나 민중의 생활사는 기록되지 못하고 외곽에 있었어요." 출토 유물 현장에서 연락이 오면 급히 달려가는 사람. 지금까지 그가 관여한 출토유물 복식은 1200점이 넘는다. 출토 유물을 기증 받으면 제자들과 빨고, 손질하고, 보수하고, 전시하고, 세미나까지 한다.

"출토복이 나온지가 30년 밖에 안돼요. 1세대밖에 안돼요. 출토복을 이렇게 수습하고 보수해서 전시하고, 학술세미나까지 하는 곳은 거의 없어요. 어느 박물관도. 옷을 가져와도 만질사람이 없는 거지요. 옛날 것은 모두 손으로 바느질까지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의 연대를 확정하고 추정하면 출토복의 연대가 나온다. 무덤에서 지석이 나오고 무연고로 아무것도 없을 때는 옷을 추정해서 연대를 알아내기도 한다. 우리 문헌에는 왕실은 나오지만 옷의 변천에 대한 기록은 없단다. 출토복을 보면 색이나 바느질, 크기는 물론 전기, 중기, 후기가 다 나온다. 옛사람의 옷을 통해 끊겨진 우리의 복식사 복원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사극? 보지 않아요. 너무 두렵기 때문이죠." 그의 눈에 사극은 극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우선 옷부터 눈에 들어온다. 틀린 것이 너무 눈에 보이는데 그것을 참을 이유가 없다는 것. 박물관에 전시된 의상들만해도 그렇다. 전시된 의상들의 용어나 연대, 잘못된 설명같은 것부터 눈에 들어온다. "박물관에 복식전문가들이 있어야해요. 한 시대의 의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대로 보여줘야죠. 그래야 우리 전통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지요. 굉장히 시급한 문젭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입을거리가 가장 심하게 변했다는 그는 갑오개혁,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시대상황이나 역사적 사건이 의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얼마전 그에게 복식학자로서의 보람을 갖게 한 사건이 있었다. 조선시대 문인 고산 윤선도 집안의 유물을 직접 수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 경기도 광주에 있는 무덤을 이장하는 현장에서 였다. "400여년 된 복식 유물을 직접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죠."

# 석주선 김동욱 유희경 한국복식 세 거목한테 배워 

피아니스트 혹은 성악가의 길에 들어섰을지도 몰랐다. 방향을 틀었더라면. 신성여중시절 피아노 교실 열쇠를 맡고 다니던,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소녀였다. 여섯 딸 가운데 셋째. 누구나 가난하던 시절이었고, 공부하고 돌아오면 밭에서 일을 해야했다,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공부를 매우 잘하던 두 언니와 달리 사범학교를 권했다.

'시민위안의 밤'이 열리던 관덕정에서 '은파'를 연주하기도 한, 속은 야물찼던 이 소녀는 1962년 사범학교를 졸업하자 굳은 결심을 결행, 서울로 떠난다. 열아홉살이었다. 동생한테만 말했다. "선생이 된다하면 정말 많은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지요. 전지전능해야 하는데 나는 공부가 너무 모자라다는 생각이었죠. 교사가 되려해도 이미 자리가 가득찼던 시절이지만 진짜 선생이 되려면 모든 세계를 알아야한다고 생각했지요."

고향을 떠나왔으니 오로지 홀로 돌파해야 했다. 어떤 난관도, 어떤 곡절도 혼자 치러야했다. 2년도 채 안된, 짧게했던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를 섭렵했다. 그 길은 그러나 매우 가팔랐다. 그의 학교이력이 다양한 것은 당시 관련 학과를 찾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 제주의 의생활에 대한 관심은 1971년 「제주도 복식의 민속학적 연구」로부터 시작된다. 박사논문은 「제주도 의생활의 민속학적 연구」. 스물아홉에 대학 강단에 처음 섰다.

이때부터 그의 발품은 시작됐다. 한국복식학계의 권위자 석주선 선생 밑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복식을 체계화하는데 일조했다. 학문적으로 그는 이미 세상을 뜬 석주선 김동욱과  유희경 등 한국복식학계의 삼대 거목에게서 배우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별로 인기학과도 아니었던 외로운 학문의 길, 홀로 가는데 어려움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울릉도 도동항 절벽에 향나무 하나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어요. 저 바위가 북풍한설 맞으면 견디거늘 인간인 내가, 제주도 어머니의 딸이 왜 못견디랴 다시 마음을 잡았죠." 사십대였고, 민학회서 울릉도 답사를 떠난 때였다. 거기서 그의 스승인 자연과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 어머니는 스승이자 신적인 존재

1997년, 그는 여든 네 살의 어머니와 고향에서 갈옷을 만들었다. 열흘 남짓 여남은 벌을 만들었다. 모녀가 각기 입었던 시대의 옷을 만들기로 한 것. 그런데 어머니의 옷은 달랐다. 어머니때 입던 적삼이나 중이는 길이가 짧고 소매나 바지통이 너무 좁았다. 교수 딸은 옷감 아끼지 말고 좀 더 잘만드시지" 투정했다. 어머니 말씀, "옛날 갈적삼은 겨우 가슴 여밀만큼 짧고, 소매는 지금 와이셔츠처럼 좁았져. 옷감이 귀하니 아끼고 일할 때 옷이 크면 걸리적 거려. 갈옷은 호사가 아니고 노동복이난." 그 말씀은 옳았다. 제주옷은 제주인의 희노애락이 담겨있다. 그런 얼이 있어야 한다는 것. 아기들에게 왜 거친 삼베옷을 입혔을까. 삼베가 피부병에 좋고 일손 바쁘고 물 귀하던 시절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란다. 사리 밝고 명쾌했던 어머니. 바느질, 음식 아무 것도 쫓아갈 수가 없었던 제주의 어머니는 여장부였다. "어머니는 내게 스승이요. 신이죠."

어머니는 그렇게 늘 그를 한수 가르쳤다. "이불호청 가장자리가 풀어져서 풀려. 이것을 안 메꿨어. 이것을 안 메꾼 이유를 이제 알았어요. 이불호청, 요 호청 올이 풀리게 터놔야해. 막아버리면 길이 막혀버려. 옛날 옷도 호의 끝은 막지 않았어요. 출토복을 보니까 옷고름 끝이 그런게 많아. 그리고 어깨도 안 메워. 날개야. 그때야 바로 이것이구나 그랬죠. 어머니한테서 아무 것도 모르고 했던 것이. 유물과 민속조사를 나갔더니 딱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던 것이지요."

어머니는 다듬이질할 때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궁퉁이'를 내라. 너 스스로 깨쳐라고. 마루바닥을 얼굴 비치도록 닦으라고. 아프걸랑 죽으라. 일 안허걸랑 먹지말라. 백프로 인간교육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나는 가장 욕을 많이 들은 딸이죠. '간세쟁이'에 몸이 약해 비실댔죠." 그는 늘 정신력이라고 생각한다. 열아홉에 집을 나설 생각을 한 것은 그런 어머니 밑에서 이미 성인이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방학이 되면 이불호청 뜯고 냇물에 나가 빨았다. 어머니가 한번도 시키지 않았지만 알아서 했다. 그래도 혼이 났다. "알루미늄 솥 한내창에 걸어놓고 불 때멍 양잿물에 삶앙 빨앙 말려서 또 물에 담강 바래죠? 풀행 다듬어야 되잖아요. 중학생이 다듬을 줄 모르면 언니랑 같이 했어요."

# 갈옷은 전통대로, 감물염 옷 새이름 얻어야

"퓨전이 우리 문화를 장악하고 있어요. 우리 것은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것을 몰라요. 색, 계절, 계급, 옷감, 바느질, 크기 다 달라요. 풍부하고 멋진 과학이 스며있죠." 그런데도 우리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은 너무 힘들고 외롭다. 하루가 다르게 전통과 정통성을 스스로 버리고 잃어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복식학자 고부자. 그가 우리옷을 위해 지금 끌고 가는 삼두마차는 전통복식연구소의 월례발표회와 단국대평생교육원의 전통복식과정 교육, 부여전통문화학교에서의 우리옷 강의다. 그는 그래도 지금 교육을 받고 있는 세대들에게 희망을 걸만하다고 자신한다. 그동안 설움을 받아온 우리옷에 날개가 달릴거라고.

"제주 옷에 긍지를 가져야됩니다. 갈옷은 사계절이야. 제주도 박물관만 하더라도 갈옷을 제대로 전시해야죠.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얼굴이고 우리를 잉태하게 해준 옷 아닙니까. "

전통은 늘 현대와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요즘은 갈옷도 드라이클리닝 해야 하는 고급 옷으로 바뀌어졌다. "패션화된 옷은 갈옷에서 나온, 갈옷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옷이라는 것을 알아야해요. 가령 어느 마을에서 감을 심고 그것으로 옷을 염색하면 좋지요. 지금 보면 어떤 갈옷은 화학염색을 해서 색깔이 변한다고 항의하기도 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제대로된 감물염을 해야돼요." 그는 요즘 양주시 회암동에서 출생했다는 김삿갓의 인물상 및 복식 재현 용역을 맡아 일을 하고 있다. 그에게 옷은 역사의 한 부분이고, 조상들의 지혜이다. 정년 퇴임후 어떤 계획을 갖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 "평생 이 길을 가고 싶은거죠. 학문적으로도 해야될 것이 많고. 나는 매일 매일이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