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탄압한 일본군 헌병 출신
김구선생 암살과 4.3에도 개입

 * 김창룡은 누구인가
 ‘특무대장’으로 잘 알려진 김창룡(金昌龍)은 1916년 함경남도 영흥 태생으로 일제 때 일본군 헌병으로서 독립운동가를 잡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해방 후 친일경력이 드러나 사형선고를 받게 된 김창룡은 사형장으로 호송도중 탈출해 월남했다.그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김창룡은 반공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전형적인 ‘친일파 반공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47년 조선경비대사관학교(현 육사) 3기로 입교해 소위로 임관한 김창룡은 48년 여순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숙군(肅軍)작업에 깊이 개입했는데,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군인도 많았다.

 김창룡은 방첩대장 시절인 49년 6월,역시 이북에서 월남한 서북청년단 출신 안두희(安斗熙)가 김구(金九) 선생을 암살할 때 그 배후 인물로 지목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령으로 진급해 특무대장이 된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세도를 부리다,허태영(許泰榮)대령이 고용한 저격수의 총에 맞아 56년 1월 30일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허태영은 후에 회고록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은 공산당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는 양민 10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옥석을 구분하지 않는 무분별한 숙청을 지시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김창룡은 ‘제주4·3’에도 관여했다.4·3발발 초기 김익렬 9연대장이 제주도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추진한 것을 두고 이를 ‘북한의 사주’로 몰아가려 한 것이다.

 당시 제9연대 정보참모로서 평화회담에 관여하는 바람에 해임돼 군법회의에 회부됐던 이윤락(李允洛·작고) 씨는 생전에 제민일보4·3취재반에게 “군법회의 선고받던 날 새벽 육사 동기생인 김창룡이 찾아와 ‘이북에서 연락 받고 김달삼과 회담을 주선했다고만 말하면 풀어 준다’고 유혹하기에 ‘네가 동기생을 잡아먹으려고 하느냐’며 욕을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4·3은 말한다」제3권 206쪽 참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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